메이저대회 우승까지 달려온 시간
번아웃 증상 등 무기력한 상태도
아이처럼 놀면서 쉰만큼 힘낼 것
전인지가 자신의 별명인 아기 코끼리 덤보 헤드커버를 들고 있다. 그는 ’골프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푹 쉬었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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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지(26)는 지난해보다 날렵해 보였다. “미국에서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쪘던 살이 없어졌다”며 웃었다. 전인지는 동계훈련을 충실히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 ‘한국인 입국을 막는다’는 소식에 급히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이러스가 더 창궐했다. 대회는 열리지 않았고, 전인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인지는 자가격리하면서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냐’는 생각에 좀 쉬겠다고 마음먹었다. 몸은 쉬는데, 마음이 쉬지 못했다.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쉴 때는 다른 선수 운동하는 모습이, 운동하면 다른 선수 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난 쉬지도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우울해지기도 했어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내 스케줄을 지키려고 했어요. ‘달려야 할 때 달리려면 쉴 때 쉬어야 한다’ 생각하니, 하고 싶은 것도 생기고 머리가 정리도 되더라고요. 안 되면 조급했는데, 하다가 안 돼도 ‘내일은 이런 식으로 해봐야겠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하고….”
전인지는 2015년 US오픈과 16년 에비앙 챔피언십 등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했다. 기세로 보면 더 큰 일을 할 것 같았는데, 이후 우승이 한 번밖에 없다. 전인지는 골프채를 잡은 후 십여 년을 쉼없이 달려왔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골프를 한 선수는 20대에 번아웃(burn out)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신체적, 정신적 피로로 인해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무기력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전인지는 “쉬면서 친구들과 골프를 쳐봤다. 대회에 나가서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친구들이랑 즐기면서 치니 골프의 진짜 재미를 알게 됐다. ‘이렇게 재미있는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나’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타당 100원, 500원짜리 내기 골프를 했는데, 짜릿짜릿했다. 10년 만에 에버랜드에도 가봤다. 다른 친구를 만나는 거였는데, 김세영 언니가 입장권까지 끊어서 깜짝 등장했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놀이공원도 가니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작은 거 하나에도 숨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인지는 “내 성적이 내 인격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번에 쉬면서 ‘성적이 어떻든 나는 나’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연습장에서 만나면 ‘보고 싶은데 왜 대회 안 나오는지’ 묻는 분들이 많다. 기다려주는 팬이 많다는 생각에 힘을 낸다”고 덧붙였다.
LPGA 투어는 31일 드라이브온 챔피언십으로 재개한다. 조만간 미국에 갈 예정이다. 만약 미국의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 더 미뤄진다면 어떨까. 전인지는 “이 방학이 길어진다면 팬과 스폰서를 위해서 뭔가 하겠다. 이제 푹 쉬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전인지는 “다른 선수들도 ‘이렇게 쉬어본 게 처음’이라고, ‘코로나로 답답하기도 하지만 몸도 건강해지고 긴 방학 같은 느낌이라서 오히려 좋다’고 한다”고 전했다. 전인지 얼굴 위로 엷고 편안한 미소가 흘렀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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