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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쿡리뷰] ‘나랏말싸미’ 역사면 어떻고, 역사가 아니면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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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역사면 어떻고, 역사가 아니면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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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취하고 뼈를 버렸다.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관련된 수많은 설 중 하나인 신미 스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역사적 고증에 철저하고 예민한 보통 사극들과 달리, 처음부터 검증되지 않은 설을 기본 뼈대로 선택한 것. 세종이 죽기 전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란 법호를 내렸다는 기록, 김만 중의 '서포만필'에 등장하는 훈민정음과 산스크리트어와의 관계 등 역사적 근거는 미약하다. 그럼에도 '나랏말싸미'는 풍부한 살을 덧붙여 아름답고 묵직한 이야기로 완성해냈다. 한글 창제라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흥미로워할 스토리에 불교계와 여성처럼 힘이 없던 이들의 시선을 더한 것이 주효했다.

고려를 망하게 했던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왕조 조선의 세종(송강호)은 신하들과의 만남마저 피하며 아들 수양, 안평과 함께 새로운 문자 만들기에 골몰한다. 세종은 문자와 지식을 기반으로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들에 맞서,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나라를 꿈꿨다. 하지만 아무리 중국 서적을 뒤져도 소리 문자에 대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소현왕후(전미선)의 소개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 문자에 능통한 신미 스님(박해일)을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임금 앞에서 무릎도 꿇지 않을 정도로 반골인 신미 스님과 세종은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 힘을 합쳐 새 문자를 완성해 나간다. 하지만 작업이 난항을 겪고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며 위기를 맞는다.

'나랏말싸미'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 불안한 조선의 이면을 비추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위로는 명나라의 신하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하고, 아래에선 왜국이 조선의 것을 호시탐탐 엿본다. 조정의 신하들조차 세종의 뜻을 받들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고 언제든 반대할 준비가 돼있다. 궁 안에서 '1000년 후 미래의 후손들도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겠다'는 세종의 뜻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의 답답하고 절실한 상황은 그 문자를 가장 잘 활용할 이들을 찾게 만드는 계기로 전환된다. 소현황후로 대표되는 여성, 신미 스님으로 대표되는 불교계가 대표적이다. 당시 가장 천한 취급을 받던 이들은 가장 열성적으로 한글 창제에 달려든다. 극 중 세종은 신미 스님의 언어적 능력이 뛰어났을 뿐이라는 우연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문자라는 한글의 본 뜻을 생각하면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던 영화 '사도'가 떠오르는 영화다. 두 영화에서 모두 임금으로 등장한 송강호를 기준으로 '나랏말싸미'는 '사도'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사도'가 예정된 비극으로 치닫는 무겁고 차가운 영화였다면, '나랏말싸미'는 축복으로 나아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사도'가 아비와 자식의 관계를 지켜보는 좁고 깊은 이야기였다면, '나랏말싸미'는 임금과 백성, 유교와 불교, 남성과 여성, 조선과 중국 등 다양한 관계를 다루는 광범위한 이야기다. 2014년 개봉한 '사도'가 두 남자의 강렬한 애증과 갈등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면, 2019년 개봉하는 '나랏말싸미'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구도로 발전했다. 남성들을 졸장부로 만들어버리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궁궐이나 인물들의 모습을 안정감 있는 영상으로 담아내 예쁜 사진첩을 보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해인사와 부석사, 봉정사 등은 열연하는 배우들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낸다. 영화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 이후 16년 만에 다시 만난 배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은 당연하다는 듯 완벽에 가까운 연기 호흡을 보여준다. 극 중 자음이 발음되는 구강 내 위치를 찾는 장면에선 극장 여기저기서 해당 자음을 작게 발음하는 진풍경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오는 24일 개봉. 전체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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