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박 감독에 대한 기대감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은 대표팀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국과 외국인 감독을 잇따라 기용했지만 결과가 지지부진했고 일본 감독을 데려왔다가 크게 실패한 전력이 있었던 베트남축구연맹으로선 한국도 고려 대상이었을 뿐 박 감독에게 획기적인 전략·전술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시작은 어느 정도의 운도 작용했다. 박 감독이 베트남 국가대표팀(A대표팀·U-23)을 맡은 지 두 달 만인 지난해 12월 치른 M150컵 태국과의 경기에서 2대1 승리를 거둔 것. 두 나라는 축구 라이벌로 베트남 국민 정서는 태국을 한 수 아래로 보면서도 10년 동안 태국을 이기지 못해 불만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미우라 도시야 전임 베트남 대표팀 감독(일본)이 경질된 배경 역시 2018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을 포함해 최근 3경기에서 모두 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선수들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운 두 달 만에 10년 만의 태국전 승리를 안겨 전방위적인 신뢰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다.
이후 베트남 대표팀은 연이어 '사상 최초'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태국을 이긴 기세를 탄 U-23 대표팀은 올해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사상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다. 이는 대회 4위에 머문 한국을 뛰어넘는 성적으로, 박 감독과 선수단은 베트남 총리로부터 3급 노동훈장을 받았다.
이어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통일 베트남(1976년) 이래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회 직전까지는 베트남 내에서도 아시안게임 선전을 기대하지 않은 터라 박 감독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환호는 증폭됐다. 실제로 박 감독은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전 베트남 문화체육부 장관을 만나 "아시안게임은 예선만 통과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11일과 15일(한국시간) 치른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에서 말레이시아(1·2차전 합계 1승1무)를 꺾으면서 박 감독의 커리어는 완성됐다.
베트남으로선 2008년 이후 10년 만의 우승으로 특히 이 대회에서 체력 보강과 자신감 회복에 중점을 뒀던 박 감독의 훈련 방식이 더욱 빛났다. 크고 작은 대회 참가로 체력적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도 베트남은 기존에 보였던 후반 체력 저하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부족한 기술을 남들보다 한 발 더 뛰는 정신력과 체력으로 무장한 것은 15일 열렸던 결승 2차전에서 선취골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베트남에 패한 탄쳉호 말레이시아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이 대회에서 잘 뛰었고 기술적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베트남의 완벽한 우승"이라고 인정했다.
박항서호 베트남 대표팀의 '사상 최초'는 또 있다. 베트남은 2016년 스즈키컵 준결승 1차전에서 인도네시아에 패한 뒤 치른 16번의 A매치에서 9승7무를 기록해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 중 최근 10경기는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거둔 성과로, 이는 15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 중인 프랑스를 넘어서는 기록이다.
베트남은 2011년 6월 이후 7년 반 만에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두 자릿수 진입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베트남의 FIFA 랭킹 최고 순위는 1998년에 기록한 84위다.
박 감독이 바꾼 건 단순히 베트남 축구 역사뿐만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지상파에서 스즈키컵 결승전을 생중계했다. 케이블 스포츠채널을 포함한 결승 2차전 시청률은 21.9%, 우승이 확정되기 전 후반전 분당 최고 시청률은 28.4%까지 치솟았다. 이는 주말 황금시간대 예능과 드라마 시청률을 넘어서는 수치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니 책무를 다하겠다"(아시안게임 한국과의 4강전 직전), "나를 사랑해주시는 만큼 나의 조국 한국도 사랑해 달라"(스즈키컵 우승 후)는 박 감독의 말은 양국 축구팬들을 모두 사로잡을 만한 소신 발언이었다.
다음달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리는 2019 AFC 아시안컵은 박항서호 베트남의 진가가 다시 한번 드러날 수 있는 무대다. 지난해 10월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래 베트남 국가대표팀이 치렀던 어떤 대회보다도 참가국들의 수준이 높다. 객관적 전력에서 우위로 평가받는 한국조차 50년 넘게 우승하지 못한 대회인 만큼 이 대회에서까지 베트남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박항서 체제는 더욱 견고해질 전망이다. 베트남은 중동의 강호 이란·이라크, 복병 예멘과 D조에 속해 있다. 베트남이 올린 아시안컵 최고 성적은 개최국(동남아 4개국 공동 개최)으로 참가한 2007년 대회 8강이다.
[이용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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