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인의 밤에서 이수항 챔프(왼쪽 세번째) /제공=조영섭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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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각자의 삶 속에 굴곡이 있듯이 한 세기에 달하는 복싱역사 속에도 부침이 있다. 순간 순간 영욕이 교차되는 갈피 속에 숨겨진 소중한 사연들을 들춰보면서 오늘의 복싱비화를 시작해 본다.
1982년 7월 25일, 당시 서울 중구 정동의 문화체육관에서 국내 복싱 사상 최초로 동태평양(OPBF) 라이트 헤비급 결정전이 열렸다. 동급 OPBF 2위 이수항(당시 23세·7전5승1무1패 4KO)이 동급 1위인 일본의 스즈끼 도시아끼(당시 28세·10승4패 10KO)와 대결했다. 그는 2차례 다운을 뺐는 등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4회 KO승을 거두며 한국복싱 사상 최초로 라이트 헤비급 동양챔피언에 등극했다.
한국의 강흥원과 박백용을 KO로 잡았던 관록의 스즈끼 도시아끼도 이수항의 스커드 미사일처럼 터지는 맹폭에 백기를 들며 주저 앉았다. 라이트 헤비급은 1967년 김덕팔(1942년생·8전5승2패1무 3KO)이 국내선수로 아시안게임 2연패(1962년, 1966년)를 달성한 후 프로에 데뷔해 첫 스타트를 끊었지만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1959년 남양주 출생의 이수항은 1977년 광동고 2학년때 체육교사였던 이몽현(1947년생·중앙대) 선생의 지도로 복싱에 입문한 후 동문인 노창환·김익겸과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이듬해인 1978년 제32회 전국 신인선수권대회에 라이트헤비급으로 출전, 결승까지 진출해 부산대표 장상기(현 부산복싱협회 심판부장)에게 고배를 마셨지만 값진 은메달을 획득했다. 1979년에는 MBC 신인왕전(미들급)에 출전해 한익상을 꺾고 우승했다. 아마추어시절 전국체전과 대통령배 경기도 선발전에서 번번히 이수항의 발목을 잡았던 상대였기에 기쁨은 배가 됐다.
이수항 전 OPBF 동양 챔피언 /제공=조영섭 관장 |
이수항은 1980년 4월 제3회 한일 신인왕 교류전에 출전했다. 박종철·조진현·안상렬·안현·정기영·황준석 등 각체급별 우승자들과 함께 일본나고야로 원정을 떠난 것이다. 일본 미들급 신인왕인 무라카미 선수와 맞대결한 이수항은 184㎝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묵직한 왼손 스트레이트를 거푸 작렬시키며 통쾌한 3회 KO승을 거뒀다.
한일 정기전 최우수선수상은 플라이급에서 조진현을 꺾은 후에 WBA·WBC 슈퍼 플라이급 통합 챔피언에 오른 와타나베 지로에게 돌아갔지만 이수항은 쓸만한 물건임을 복싱계에 알리게 됐다. 한편 라이트 플라이급의 박종철은 후에 김환진을 누르고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도카시끼 가쓰오를 꺾으며 자존심을 세웠다.
참고로 일본은 1954년부터 신인왕전을 시작하면서 와지마 고이치·파이팅 하라다·와타나베 지로 등 걸출한 복서들을 배출했고 한국은 8년 늦은 1962년부터 신인왕전을 개최해 김태식·장정구·백인철·박종팔 등이 등장했다. 한일신인왕 교류전은 복싱역사가 길고 인적 자원이 많은 일본에서 먼저 제의해 1977년부터 시작됐다
한일 신인왕 정기전에서 승리하며 탄력을 받은 이수항이었지만 후원업체가 없었던 영세 체육관 소속이어서 생계를 위해 투잡을 병행하느라 체계적으로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게다가 동 체급에는 1980년대 초반 톱 복서들인 박종팔·백인철·나경민·유병래 등 군웅할거(群雄割據) 상태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1981년 6월 유병래(동아체육관)와 한국 미들급 타이틀전을 치렀지만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 이수항은 마이너리티로 전락할 위기에 봉착했다. 은퇴와 재기의 갈림길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계체중 79.450㎏ 의 라이트 헤비급이 신설되면서 돌파구가 생긴다. 이수항의 복싱인생에 터닝포인트였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동양권에서 라이트 헤비급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상태이다 보니 1년 후에야 1차 방어전이 잡혔다. 긴 공백에 따른 연습부족으로 게리 허블(호주)에게 고배를 마시면서 이수항은 사실상 복싱을 접었다. 7년이란 세월동안 단 13차례 경기를 치렀으니 복싱이란 그에게 직업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개념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동양 정상에 등극했을 때 동양타이틀이 걸린 13체급에서 한국은 밴텀급(무라다 에이지로) 단 한체급을 제외한 12체급을 석권한 복싱 최강국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양 최정상에 섰던 12명의 챔프들이 스쳐간다. 김성남, 신희섭, 권순천, 정순현, 오민근, 문태진, 김득구, 김응식, 황준석, 백인철, 박종팔, 이수항이 주인공이다.
상전벽해가 된 작금의 현실에 비춰볼 때 ‘권불십년(權不十年)’이 아닌 ‘권불십년(拳不十年)’이 되어버렸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한국 권투의 영화도 10년을 버티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살아가는 인생사 과정이란 희노애락이 점철돼 이뤄지는 일일연속극이 아닐까.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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