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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名피아니스트 지메르만의 ‘깜짝 반전’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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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名피아니스트 지메르만의 ‘깜짝 반전’

서울맑음 / -3.9 °
모든 촬영 금지… 연주곡 당일 공개
관객 기침은 너그럽게 웃으며 허용
바흐·쇼팽 등 전주곡 25곡 연주
“연주자의 입퇴장은 물론, 앙코르와 공연 종료 시까지 모든 녹음·녹화·사진 촬영이 엄격히 제한됩니다.”

©Rowan Lee바흐·쇼팽·라흐마니노프 등의 전주곡들을 모아서 연주한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Rowan Lee바흐·쇼팽·라흐마니노프 등의 전주곡들을 모아서 연주한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70)의 독주회. 공연 시작 전부터 장내 방송으로 ‘폭풍 잔소리’가 쏟아졌다. 휴대 전화는 미리 끄고 가방 안에 넣는 건 물론,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전후반 끝날 때만 박수를 치라고 시점과 횟수까지 못박았다. 안내 방송으로는 미덥지 않았는지, 안내원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면서 두세 번 육성으로 다시 외쳤다. 압권은 마지막 안내 방송이었다. “오늘 음악의 흔적이 온라인 상에 남는다면 연주자는 ‘깊은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깊은 배신감’이라는 생경한 표현에 그 순간 잠실 공연장이 아니라 여의도 국회에 왔나 싶었다.

지메르만은 197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반 세기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연주자. 조성진·박재홍 같은 한국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조언자(멘토)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경고문과 다름없는 깐깐한 공연 관람 수칙으로도 악명이 높다. 이날 연주회에는 한 가지 독특한 점이 더 있었다. 바흐와 쇼팽, 드뷔시와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前奏曲)이라는 대략적인 ‘출제 범위’만 밝혔을 뿐, 정확한 연주 곡목은 공연 당일에야 밝힌 것이다. 클래식 공연에서는 길게는 수 개월 전에 연주 곡목을 미리 공지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다.

백발이 성성해진 지메르만은 이날 직접 악보를 들고서 무대에 입장했다. 한 곡이 끝날 적마다 악보를 넘기면서 연주를 이어갔다. 전주곡은 책의 본문 이전에 나오는 서문처럼 기악곡이나 성악곡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곡을 일컫는다. 본래는 ‘애피타이저’에 가까웠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서 쇼팽처럼 전주곡만으로도 훌륭한 ‘메인 요리’를 만드는 작곡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들을 기둥처럼 배치한 뒤, 다(C)장조와 가(A)단조처럼 연관성 있는 장·단조 작품들을 맞물려서 25곡의 전체 연주회를 구성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흡사 ‘세상의 모든 전주곡’을 모아서 하나의 연주회를 만드는 ‘전주곡의 오마카세’ 같았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깐깐하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지메르만의 또 다른 ‘숨은 얼굴’도 엿볼 수 있었다. 곡 하나가 끝날 때마다 서둘러 다음 곡으로 넘어가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바흐나 쇼팽의 유명한 전주곡이 나올 때면 오히려 속도를 뚝 떨어뜨려서 느리게 연주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주문 같았다. 음을 펼쳐서 연주할 때 출발점이 되는 근음(根音)을 일부러 강하게 치면서 능청스럽게 객석을 돌아보는 장난기도 간간이 선보였다.

이날 한겨울 객석에서는 곡이 끝날 때마다 마른기침 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지메르만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서 기다리거나 맘껏 기침해도 괜찮다는 손짓을 보내자 객석에서는 연신 웃음꽃이 번졌다. 이처럼 공연장 소음의 주범인 휴대전화 소리가 사라지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 특유의 아늑한 정감이 되살아났다. 까칠한 거장의 따스한 ‘깜짝 반전’이었다. 지메르만의 독주회는 15·18일 롯데콘서트홀, 20일 부산콘서트홀, 22일 대구콘서트하우스로 이어진다. 지메르만은 앞으로도 연주곡은 조금씩 달라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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