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미국 뉴욕으로 이송된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부부에 대해 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항의 시위가 열렸고(왼쪽), 같은 날 칠레 수도 산티아고 에서는 미국 성조기를 든 베네수엘라인들이 환호하고 있다./AP 연합뉴스 |
2026년 신년 벽두는 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전격 축출과 함께 시작되었다. 과거 우고 차베스 대통령 시기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반미(反美) 정치를 대표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3시간 만에 생포해 오면서 세계가 술렁이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 파급 효과는 베네수엘라가 속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강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미국의 오랜 간섭과 개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 행동을 ‘주권 침해’라며 규탄했다. 가장 강경한 외침은 미국 턱밑에 있는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나왔다. 하지만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산디니스타 혁명을 이끈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도 미국을 강력히 비판했다.
일러스트=이철원 |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가 미국을 규탄한 것은 아니었다. 환영의 목소리도 나왔다.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 칠레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통령 당선인은 좌파 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며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서반구 회귀’를 둘러싸고 중남미가 둘로 나뉘는 모양새다.
사실 현재 구도는 지난 10년간 심해진 라틴아메리카의 이념적 대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적용된 지역’으로 알려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반엘리트, 반신자유주의, 반미를 기치로 내건 좌파 포퓰리즘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크게 부상했다. 일국 선거에서 좌파의 승리는 인접국 선거로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중남미 좌파의 부상을 일컫는 ‘핑크 타이드(Pink Tide)’라는 용어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좌파 정부는 중남미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포퓰리즘에 의지했고, 미국과의 대립은 각종 경제·외교적 비용을 만들어내 국가 운영의 난도를 훌쩍 높였다. 게다가 원주민 운동과의 결합, 문화적 진보주의 수용도 보수적 백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종교 가치 회복, 질서 확립, 경제 정상화를 내건 새로운 우파 운동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급부상하며 핑크 타이드와 대결을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우파 운동은 지주·군부·가톨릭으로 구성된 기존의 전통적 우파를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우파 포퓰리즘이었고, 같은 시기 미국에서 폭발한 트럼프주의 포퓰리즘과 긴밀한 이념적 연대를 구축했다. ‘열대의 트럼프’로 불린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2018년 선거에서 당선된 사건이 그 시작을 알렸다는 평이 많다. 이후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에콰도르에서 우파 운동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2021년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 당선으로 핑크 타이드에 합류한 칠레는 2025년 선거에서 ‘칠레의 트럼프’라 불리는 카스트 당선인이 승리를 거두며 다시 우파로 기울었다. 포퓰리즘 정서를 공유하는 좌우파가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며 이념 갈등의 진폭이 커지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우파의 부상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조치원역 앞에서 ‘한미 FTA가 체결되면 우리가 NAFTA를 체결한 멕시코처럼 미국에 종속될 것’이라는 전단지를 받은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신자유주의 반대가 울려 퍼지던 200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좌파 운동은 한국 좌파 운동에도 굉장한 영감을 주었다. 이는 반대로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우파의 부상이 한국 우파 운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범죄와의 전쟁’을 내건 부켈레 대통령이나 ‘좌파 포퓰리즘 근절’을 내건 밀레이 대통령이 한국에서도 알음알음 밈(meme)처럼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라틴아메리카는 냉전, 혁명, 신자유주의, 좌파 포퓰리즘을 막론하고 다가올 세계적 흐름이 가장 먼저 관측되는 곳 중 하나였다. ‘남미화’라는 말을 ‘우리가 빠질 함정’으로 여기며 정치적 공격의 수사로 쓰는 것보다, 앞으로 더 진지하게 라틴아메리카를 들여다봐야 할 이유다.
[임명묵 대학원생·'K를 생각한다' 저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