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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천상여행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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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시집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시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던 한국 문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88)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세.

22일 문학계와 유족에 따르면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8시 17분께 경기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의 사위인 최호열 전 여성동아 편집장은 "한 달 전부터 완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로 계시다 떠나셔서 임종에 이르러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셨다"며 "2020년까지는 간간이 집필도 하셨지만 그 이후로는 병세가 악화해 펜을 거의 잡지 못하셨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낮달' 등의 시가 추천돼 등단했다. 한평생 농민과 서민 등 민중이 겪는 고달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잔잔하게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시를 써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그도 한때는 10년 동안 시와 등진 적이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고 서울에서 잡지사, 출판사 등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1965년 다시 펜을 잡은 그는 1971년 잡지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농무' '전야' '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도 대부분 이 시기 이후 탄생한 것들이다. 특히 농민의 애달픈 삶을 절절하게 녹여낸 시는 그에게 '민중시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으로 감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늘 불의에 눈감지 않았다. 농민문학, 민중문학을 주제로 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신 시인이 생전에 출간을 통해 마지막으로 독자와 만난 작품은 그의 시집 '농무'(1975)의 수록작 '그 여름'(1974)이다. 창비의 시선집 '창비시선'이 500번째 시집 출간을 기념해 지난 3월 출간한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을 통해서다. 공교롭게도 창비시선의 1호 시집은 신 시인이 농민을 대변해 썼던 '농무'였다. 이번 특별시선집은 그동안 창비시선을 통해 출간된 시 가운데 시인 400명이 가장 아끼는 시를 모은 것이다. 그중 하나로 꼽힌 신 시인의 '그 여름'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돌아 다시 독자의 품에 안긴 셈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 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신경림 '그 여름')

한국 문단을 이끌었던 원로가 세상을 떠나면서 문학계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정호승 시인은 고인에 대해 "김수영, 신동엽 시인 이후 한국 참여시·민중시의 맥을 이어 꽃을 피운 분"이라며 "언제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질곡, 현실적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참여적인 시를 쓰셨던 분이 떠나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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