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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한국 문단 거목’ 시인 신경림 별세…민중의 삶을 시에 담은 ‘민중문학 개척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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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 신경림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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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로 19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세.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신 시인과 연을 맺어온 서홍관 국립암센터 원장(시인)이 마지막까지 고인의 곁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서 원장은 “7년 전 대장암이 발병했는데, 치료를 잘 받으셔서 많이 좋아지셨었다. 하루 5000보를 걸으실 만큼 정상적인 활동을 하셨는데 재발이 되면서 호스피스 병동에 모시게 됐다”라며 “선생께서 워낙 깔끔하신 분이라서 남들에게 폐가 될까 봐 아픈 걸 알리는 걸 굉장히 꺼리셨다. 병문안 오고 싶어하는 분들은 많았지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가족 외에는 거의 오지를 못 하셨다”라고 말했다.

신 시인은 1970년대 소외된 농촌의 열악한 현실과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무’ ‘파장’ 등의 시를 발표해 문단의 파란을 일으켰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농무’ 중)

1973년 발간한 첫 시집 <농무>는 이듬해인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경쟁작이 고 박경리 작가의 <토지> 황석영 작가의 <삼포 가는 길>이었다. 처음에는 시집을 내주겠다는 곳이 없어 자비로 출간했던 <농무>는 문학상 수상 이후 1974년 창비에서 재출간됐다. 최근 500호를 찍은 ‘창비 시선’ 1호의 출발이었다. 이후 <농무>는 1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신 시인은 대중의 삶과 괴리된 현학적인 작품을 경계하며 당대의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뚜렷한 문학관을 견지해왔다. 1974년 5월 7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소감으로 “발레리나 말라르메의 풍의난삽한 시는 오히려 우리 문단에 악영향을 주었다”며 “혼자만이 아는 관념의 유희, 그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시에 대한 반발로서 더욱 대중의 언어로 대중의 생각을 끄는 것이 내가 주로 생각하고 있는 시”라고 밝히기도 했다.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2016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염무웅의 해방 70년, 문단과 문학 시대정신의 그림자’에서 “시골 장터나 도시 변두리를 배회하며 오랫동안 문학적 공식 석상에 자기 대변자를 갖지 못했던 뜨내기들이 이제 신경림을 통해 ‘민중’으로 호명되고 자기들 삶의 억눌린 설움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라며 그의 시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자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말한다면 이 잡지 1970년 가을호를 위해 신경림의 ‘눈길’ 등 5편의 시와 1971년 봄호를 위해 황석영의 중편소설 <객지>를 원고로 읽었을 때 엄습한, ‘민중문학’의 실체에 직접 맞닥뜨렸다는 생생한 실감을 메마른 개념적 어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민중문학 탄생의 현장에 최초의 목격자로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감격이 너무 컸다”라고 회고했다.

시인은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문단의 자유실천운동과 민주화운동에도 부단히 참여해왔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여러 단체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휘말려 구속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는 등 꾸준히 현실참여를 이어갔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때 이를 규탄하는 희망버스 사회원로 지지 선언에 동참했고, 고 김근태 의원을 기리는 김근태상 초대 선정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2015년 세월호 1주기에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를 발표했고, 이는 다른 시인들의 추모시를 함께 엮은 동명의 시집으로 출간됐다. 제주 4·3항쟁의 아픔을 담은 <검은 돌 숨비소리>(공저·걷는사람)도 펴냈다.

지은 책으로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와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민요기행 1, 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2> <바람의 풍경> 등이 있다. 생전에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마지막 단독시집으로는 2014년 출간한 <사진관집 이층>(창비)이 있으며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창비와 새로운 시집 출간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했졌다. 창비 측에 따르면 고인의 미발표작 등을 모아 유고시집을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며 도종환 의원이 장례 집행위원장을 맡을 예정이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평론가협회 등 문인 단체들은 고인의 장례를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르기로 뜻을 모았다. 장례는 4일장으로 진행되며 발인은 25일 토요일 오전,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의 선영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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