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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히잡 시위’ 강경 진압 이란 대통령 사망, 개혁의 여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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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축’ 지원 공들인 강경보수 이란 지도자, 헬기추락 사망
6월28일 차기 대선 “대외 정책 기조엔 변화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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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20일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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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출장길에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향년 63. 이슬람 시아파 종주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고로 이란 내부는 물론 중동 전역이 술렁인다. 라이시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란 안팎에서 어떤 파장을 낳을까?



국제사회 이란 제재, 사고의 씨앗

2024년 5월21일 <이르나>(IRNA) 통신 등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라이시 대통령은 5월19일 오전 이란-아제르바이잔 국경지대에서 열린 키즈칼라시 댐 준공식에 참석했다. 2023년 1월 테헤란 주재 아제르바이잔 대사관 총격 사건에 이어 같은 해 3월 시아파 국가론 처음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에 대사관을 열면서 냉랭해진 양국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해당 댐은 두 나라가 아라스 강 유역에 건설한 세번째 합작품이다.



행사를 마친 라이시 대통령 일행은 같은 날 오후 헬리콥터 3대에 나눠 타고 현지를 출발했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이란 북서부 산악지대인 졸파 인근을 지나던 헬리콥터 1대가 갑자기 방향을 잃고 추락했다. 밤샘 수색 작업 끝에 5월20일 오전 이란 적신월사 구조대가 추락 현장을 발견했다. 불에 그을린 동체에 생명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라이시 대통령과 동승했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이한 외교장관을 비롯한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란 쪽에선 최악의 기상 조건과 함께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를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제재로 인해 낡은 헬리콥터의 부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게 사고의 결정적 이유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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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오른쪽)이 2024년 5월19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양국이 합작해 건설한 키즈칼라시 댐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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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일행이 탑승했던 추락한 헬리콥터 잔해를 5월20일 이란 구조대가 발견했다. 이란 국영 텔레비전(IRIB) 영상 갈무리.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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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4일 이란 적신월사 요원 등 구조대원들이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숨진 희생자의 주검을 현장에서 옮기고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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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즉각 5일 간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세계 각국에서 애도가 쏟아졌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란과 시리아 정부는 물론 레바논(헤즈볼라)·이라크(이슬람저항군)·예멘(후티 반군)·팔레스타인(하마스 등)의 무장세력을 포괄하는 이른바 ‘저항의 축’에 공을 들여왔다. 저가 무인기 지원 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도 적극 후원했다. 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범죄’를 가장 앞장서 비판했다. 군을 동원해 이스라엘 본토를 직접 공격(2024년 4월13일)한 것도 라이시 대통령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그의 부재가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란 전망은 거의 없다. 이란의 독특한 정치 구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 결정의 집행자, 대통령

이란 헌법 제110조는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는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최고지도자는 △정부 정책 감독권 △국민투표 부의권 △군 통수권·전쟁 선포권 △주요직 임면권 △선거 결과 승인권 △대통령 해임권 △사면권 등을 보유한다. “이란에서 대통령직은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최고지도자의 결정을 집행하는 자리”란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5월21일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 관계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라이시 대통령 사망 이후 이란의 대외정책에 변화나 조정은 없을 것으로 본다. 중동 각국과 양자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이스라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축’ 지원도 계속될 것이다. 중국·러시아와 경제협력을 확대하는 한편 미국·유럽과 맞서 강경한 자세를 유지할 것이다. 핵 개발과 관련해서도 모호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우라늄 농축 등 핵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이란 내부는 어떨까? 이란 헌법 131조는 대통령이 “사망, 해임, 사임, 기타 유고 또는 2개월 이상 치료를 요하는 질병에 걸렸을 때는 최고 지도자의 승인을 거쳐 제1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며 “차기 대선은 50일 안에 실시한다”고 규정한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이미 무함마드 모크베르 제1부통령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승인했다. 장례 일정과 함께 차기 대선 일정도 확정·발표됐다. 5월30일부터 대선 후보 등록이 시작된다. 6월12일엔 공식 선거운동이 막을 올린다. 투표일은 6월28일로 정해졌다. 과반 이상 득표자가 없으면, 1주일 뒤인 7월5일 1~2위 후보 간 결선투표가 치러진다.



결론적으로,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이란은 다시 한번 정치적 격랑으로 빨려들고 있다. 하긴, 그의 이력이 곧 이란 정치의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에브라힘 라이솔사다티(약칭 라이시)는 1960년 12월 이란 북동부 라자비호라산 주 주도인 마슈하드의 이슬람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도 테헤란에 이어 이란 제2대 도시인 마슈하드는 시아파 8대 이맘(이슬람 지도자)인 알리 레자를 기리는 ‘이맘 레자’ 사원으로 유명한 시아파 성지 중 한곳이다. 그는 15살 되던 해인 1975년께 시아파 신학의 중심지인 곰에서 본격적으로 성직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란에서 친미파 독재자인 레자 팔레비의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의 열기가 점차 높아가고 있던 때다.



1978년 초부터 거센 저항의 불길이 이란 전역으로 번져갔다. 18살 라이시도 거리로 나섰다. 레자 팔레비는 1979년 1월16일 궁전을 버리고 이집트로 망명길에 올랐다. 같은 해 2월1일 팔레비 왕조의 탄압을 피해 튀르키예(1964년~65년)와 이라크(1965년~78년)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이슬람 최고위 성직자를 일컫는 말로 ‘신의 징표’란 뜻) 루홀라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혁명’이었다. 삶을 규정하는 이슬람(에슬라미예)과 정치를 규정하는 공화국(좀후리예)이 하나가 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그렇게 탄생했다.



신생 공화국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혁명의 열기에 휩싸인 청년들이 1979년 11월 초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접수했다. 1981년 1월까지 무려 444일 간 미국인 50여명이 이란에 인질로 억류됐던 ‘이란 인질 위기’가 발생했다. 결국 미국은 이란과 국교를 단절했다. 그 와중에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다. 1980년 9월 시작된 전쟁은 1988년 8월에야 막을 내렸다. ‘최악의 시대’였지만, 청년 라이시에겐 ‘최고의 시대’이기도 했다.



정치범 집단 처형 주도한 청년 검사

1981년 갓 스무살을 넘긴 라이시는 테헤란 인근 카라즈 지역을 담당하는 검사로 임용됐다. 혁명 직후 정치적 숙청작업이 한창이던 때다. 젊은 라이시는 유능했다. 그는 1985년 근무지를 테헤란으로 옮겼고, 이라크와 휴전한 직후 발생한 정치범 집단 처형 사건을 주도하며 나라 안팎에 이름을 알렸다.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당시 내놓은 보고서에서 좌파 무장단체 인민무자헤딘(PMOI) 조직원을 포함해 적어도 1700명에서 많게는 4400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1989년 6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숨졌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그의 뒤를 이어 이란 최고지도자 지위에 올랐다. 라이시의 경력에도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검찰과 감사원, 법원을 오가며 승승장구 끝에 검찰총장(2014년~16년)까지 지낸 그는 2017년 5월 치러진 대선에서 재선에 나선 중도개혁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로하니 대통령은 약 57%를 득표하며 라이시(38%) 후보를 넉넉하게 이겼다. 그럼에도 라이시는 건재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비호 속에 대법원장(2019년~21년)을 지내며 차기를 대비하던 라이시는 ‘반부패’를 내걸고 출마한 2021년 대선에서 7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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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2024년 5월19일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혁명수비대 가족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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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주재 이란 대사관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을 비롯한 헬리콥터 추락 사고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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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초기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과 ‘공화국’을 구분하려 했다. 성직자 출신이 대통령을 맡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80년 1월 혁명 이후 첫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는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후임인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는 집권 한달도 안돼 암살됐다. 1981년 10월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아야톨라 하메네이였다. 이후 이란에서 성직자 출신이 아닌 대통령은 테헤란 시장 출신인 마무드 아마니네자드(2005년~2013년)가 유일하다.



1979년 이란 헌법은 총리제를 두고 있었다. ‘신적 존재’인 최고지도자의 지휘 아래 대통령은 외치를, 총리는 내정을 맡는 방식이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마지막 망명지였던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를 떠올리게 한다. 대통령 당선 직후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자신의 측근인 알리 악바르 벨라야티를 총리로 지명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개혁 성향이 강했던 혁명 초기 이란 의회(마즐리스)가 이를 막아섰다. 결국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지원 속에 개혁파 미르호세인 무사비가 총리로 등용됐다.



무사비는 7년10개월여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에 생필품마저 부족한 ‘전시 경제’를 공평하고 효율적인 배급체제로 무난하게 관리해 국민적 신망을 쌓았다. 1989년 최고지도자에 오른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개헌을 통해 총리제를 폐지했다. 이후 무사비는 2009년 개혁파를 대표해 대선에 출마할 때까지 정치권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부정선거 논란 속에 치러진 당시 선거에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거리로 몰려나온 성난 개혁파 유권자들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무사비는 지금까지 가택연금 상태다.



‘개혁파 지지부진’ 틈타 집권 성공

하나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집권 이후 역대 이란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이다. 강경 보수파인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뒤를 이은 건 온건 보수파인 아크바르 라프산자니다. 라프산자니의 후임은 사상 첫 개혁파 대통령인 모하마드 하타미였다. 그 뒤를 강경 보수파인 아마디네자드가 이었다. ‘강경 보수-온건 보수-개혁-강경 보수’란 사이클이 만들어진 셈이다. 실제 아마디네자드의 후임인 하산 로하니는 온건 보수파였다. 3대~7대 대통령까지 모두 재선에 성공해 8년을 재임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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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주재 이란 대사관 앞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서 한 여성이 전날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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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독일 베를린 주재 이란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인권단체 집회에서 한 여성이 전날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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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2021년 6월 대선은 ‘개혁파 차례’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경제학자 출신인 압돌나세드 헴마티가 온건·개혁파 단일후보로 나섰지만 득표율이 10%에도 이르지 못했다. 온건 보수파인 로하니의 후임으로 강경 보수파인 라이시가 당선될 수 있었던 건 이유는 뭘까?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 몫했지만, 무엇보다 개혁파를 대표할 만한 후보가 출마하지 못했던 게 컸다. 개혁파 하타미 대통령 집권 1기 때 부통령을 지낸 모흐센 메흐랄리자데는 선거를 불과 이틀 남기고 석연찮은 이유로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2017년 대선 때 약 73%를 기록했던 투표율은 2021년엔 48%까지 곤두박질쳤다. 전체 투표수 2875만여표 가운데 약 370만표가 무효표였다. 득표율 2위를 기록한 모흐센 레자에 후보가 얻은 표는 약 340만표였다. 개혁파 유권자들의 조직적인 ‘항의 선거’였던 셈이다.



라이시 대통령 집권 1년만인 2022년 9월13일 오후 테헤란 시내에서 히잡(무슬림 여성이 머리에 쓰는 수건) 미착용 혐의로 22살 여성이 경찰에 체포됐다. 마흐사 아미니다. 수감된 그는 사흘 뒤 숨을 거뒀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성, 생명, 자유’를 내건 시위가 이란 전역을 달궜다. 라이시 정권은 처음부터 강경하게 맞섰지만, 시위는 해를 넘겨 2023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 쪽은 시위 발생 1주년을 맞은 2023년 9월 현재까지 어린이 60여명을 포함한 시위대 550여명이 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혁명 45주년 이란, 개혁파 대통령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선거가 다가왔다. 출마 자체를 불허당한 개혁파의 보이콧 속에 치러진 2024년 3월 이란 의회(마즐리스) 총선 결과는 2021년 대선의 판박이였다. 역대 최저 투표율(41%) 속에 전체 투표수의 5%가 무효표로 분류됐다. 라이시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란 정치권에 작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개혁파를 대표할 수 있는 후보가 나오지 않는 한 2024년 6월 이란 대선 결과는 2021년 대선, 2024년 총선 결과와 엇비슷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혁명 45주년을 맞은 이란 사회의 현주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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