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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詩想과 세상]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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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때, 나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디
탕, 탕, 탕, 난데없이
오그라든 몸이 냅다
YMCA 뒷골목으로 뛰었는디
전일빌딩 쪽으로
헬리꼽따가 날아갔당께
보고도 믿기지 않는디
아무헌티도 말 안 했제,
못 했제
잊어뿔자 잘못 본 것이여
잘못 들은 것이랑께 저 소리!
총알이 정수리를 향하던 꿈을
자주 꿨어라우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는디
헛것 같은 세월이
시방……37년이락 했소?

고영서(1969~)


1980년 5월로부터 44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전일빌딩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그때 ‘나’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탕, 탕, 탕” 소리에 놀라 “YMCA 뒷골목으로 뛰었”다. “전일빌딩 쪽으로” 헬리콥터가 날아갔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헬리콥터에서 시민들을 향해 쏜 무수한 총알들, 그날로부터 ‘나’는 정지되었다.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춰버렸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하는 진실들, 강요당한 침묵들, 가슴 깊이 가라앉은 차가운 돌덩이. “잊어뿔자 잘못 본 것이여”, “잘못 들은 것이랑께 저 소리!” 집으로 돌아와 솜이불로 창문을 가렸다. 빛이란 빛은 모두 막아버렸다. “헛것 같은 세월”이었다. 밤마다 “총알이 정수리를 향하던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죽은 얼굴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 얼굴들이 모든 밤을 채워 점점 거대한 ‘나’가 되어 갔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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