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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백영옥의 말과 글] [353]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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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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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삶을 이야기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청중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데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해주던 사장이 암에 걸려 치료 중이라 이직을 고민 중이라는 사연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직하면 직원이 몇 없는 회사가 망하진 않을까 괴롭다고 했다. 놀라운 건 강사의 호통이었다. 노예가 왜 주인 걱정을 하냐는 것이다. 세상을 갑과 을로만 보는 그의 시각에 놀라 아직까지 잔상에 남는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후배의 안전을 걱정해 택시 번호판을 휴대폰으로 찍은 선배가 있다. 또 한 선배는 회식 자리의 신입에게 외모 품평에 술 따르기를 강요한 상사를 제지하며 미투를 경고했다. 대부분은 이들의 행동에서 선의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 당했다. 택시 번호판을 찍은 건 성희롱이고, 회식 자리에서 미투를 말한 건 피해자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을의 가면’의 저자 서유정은 “을의 탈을 썼을 뿐 상대에게 누명을 씌워 괴롭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근무시간에 연예인 얘기를 안 들어줬다고, 고양이 중성화 수술 얘기가 성희롱이라고 신고한 실제 사례도 있다. 진짜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합의금을 제시해도 거부하거나 가해자의 이름이 찍히는 통장을 보는 것조차 불편해 다른 곳에 기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거짓 신고인은 배상을 먼저 요구하는 비율이 압도적이고 반복 신고를 일삼는다. 실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어 지쳐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거짓 신고가 횡행하는 건 신고인에게 70~80달러의 접수비를 받는 호주나 최소한의 입증 책임을 묻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는 신고해서 성공하면 보상받고 실패해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보상만 있는 행동이 강화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예전에는 갑질이 주로 문제였다. 요즘은 을질도 상당하다. 갑은 늘 강하고 을은 약할까. 갑질하던 사람이 을이 되면 을질을 하고, 을에 있던 사람이 갑이 되면 갑질을 일삼는다. 결국 갑과 을을 넘어선 인성이 문제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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