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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권력이 알몸을 드러낼 때…부엌 아궁이로 달아난 관찰사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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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화 \'군도\'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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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성종 20) 11월13일 황해도 관찰사 김극검(金克儉)은 김일동(金一同)과 그의 일당 10여명이 신계현(身溪縣)의 감옥을 깨고 가둬둔 군도(群盜)를 모두 탈출시켰다고 보고했다. 대체로 조선 건국 후 1세기 정도, 특히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70~80년은 매우 안정적인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회의 실상은 사뭇 달랐다. 지배계급의 수탈은 가혹했고 민중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 저항의 가장 첨예한 형태가 군도였다. 이 시기 군도는 거의 모든 지방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김일동 조직 역시 그 무수한 군도 중 하나였을 뿐이다.



1482년경에 출현한 김일동 조직의 실제 활동 인원은 20여 명 정도였고, 협조자와 관련자를 합하면 전체 수는 약 1백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큰 규모였고 또 대담하고 영리하기까지 하여 조정은 토벌에 애를 먹었다.



11월13일 동료를 구해낸 김일동은 즉각 다시 활동에 나섰다. 당시 평안도에 사민(徙民)을 안착시키기 위해 파견된 체찰사(體察使) 이철견(李鐵堅)과 관찰사 김극검은 재령에서 김일동과 그 일당 예닐곱 명을 포위했다. 포위망을 뚫고 김일동 등이 탈출하자 이철견과 김극검은 김일동의 어미와 처를 잡아 해주의 감옥에 가두고 장물은 재령의 창고에 넣어 두었다.



김일동과 일당 대여섯은 한밤중에 재령 관아 동헌에서 자고 있던 김극검을 습격했다. 김일동 무리는 칼을 뽑아 들고 문을 밀치고 들어가 김극검의 이름을 부르며 위협했다. “나의 어머니와 처, 그리고 재물을 내놓지 않으면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 김극검은 겁을 집어먹고 바들바들 떨며 부엌 아궁이로 들어가 상자로 입구를 막고 숨었다. 그러고는 영리(營吏)들을 시켜 김일동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너의 어미와 처는 해주 감옥에 갇혀 있다.” 이어 장물을 남김없이 던져주니 김일동은 하나하나 확인한 뒤 노래를 부르며 떠났다. 김극검은 해직되었고 대신 이세좌(李世佐)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조정은 황해도 재령의 이웃 다섯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1490년 1월1일 간신히 김일동 조직을 토벌할 수 있었다.



김일동 부대와 조선전기에 명멸했던 수많은 군도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부엌 아궁이로 달아난 김극검의 꼬락서니다. 김극검이 누구인가? 그는 1459년(세조 5) 20살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뒤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고 50살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한 도(道)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을 쥔 것이다. 목사·부사·군수·현감과 수많은 백성이 그의 발아래 있었다. 하지만 부엌 아궁이로 들어가 숨었던 그 순간 권력의 외피가 벗겨졌고 그는 알몸을 드러내었다.



살아오면서 생래(生來)의 소유물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허다하게 보았다. 하지만 권력이란 것은 제도적 관계에 따라 어느 순간 몸에 씌워진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폭력과 사술(詐術)로 권력을 잡았던 자들의 말로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부엌 아궁이에 숨을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른 아침 ‘성종실록’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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