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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군과 10년 싸운 윤일병 유가족…“박정훈 대령 같은 수사단장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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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15일 육군28사단 훈련소 퇴소식 때 안미자씨(왼쪽)가 아들 승주씨의 군복에 이병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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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보이지 않았다.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가는 길엔 아름드리 벚꽃이 만개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입구 묘역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안미자씨는 그날의 벚꽃을 기억하지 못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벚꽃이 망울을 피우던 날에 아들이 죽었다. 벚꽃이 필 때마다 아들을 만나러 갔다. 그 뒤 벚꽃이 피고 지기를 벌써 열 번. 안씨는 “올해 현충원 벚꽃이 정말 예뻤다. 벚꽃만 보였다”고 했다.



2014년 4월7일, 승주는 맞아 죽었다. 선임병 여럿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가 최후의 일격을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군대에서는 맞아 죽은 게 아니라고, 냉동만두를 먹다 질식하여 죽었다고 했다. 그 거짓말에 맞서 10년을 왔다. 거짓말의 책임자를 밝히기 위해 10년을 왔다. 그동안 승주, 아니 ‘윤 일병’은 군대 폭력 피해자를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지금은 국회를 통과한 ‘채 상병 특검’의 긴밀한 연관 검색어가 되었다. 윤 일병 유족은 채 상병 사망사건의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을 보며 “같이 싸워주는 헌병 대장(수사단장)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기적에는 군 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선 가족의 고군분투 또한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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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일 오전 한겨레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아낸 재판기록과 조사 관련한 문서를 들고 포즈를 취한 고 윤 일병 유가족들. 왼쪽부터 매형 김진모씨, 어머니 안미자씨, 큰누나 윤선영씨.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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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한테 무릎 꿇은 큰누나…10년간 진실 파헤친 매형





‘2024 인권운동 최전선’의 11번째 주인공은 안미자(69), 김진모(49), 윤선영(46)씨다. 각각 승주의 엄마, 매형, 큰누나다. 경기 연천 육군 제28사단 포병연대 977포병대대 본부포대 의무대에서 사고를 당한 승주가 연천의료원, 국군양주병원을 거쳐 의정부성모병원에 있던 날 밤, 누나 윤선영씨는 남편 김진모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한다.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김진모씨는 사약을 받는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아 비는 아내 앞에서 결심했다. “뭐가 됐든지 간에 하루에 한 가지씩 꼭 하겠다”고. 그렇게 하여 나온 결과 중 하나가 470여건의 정보공개요청 자료다. 안미자씨는 “사위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나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군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운동이 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앞에서 “군인권보호관 사퇴하라”는 피켓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주 사건을 계기로 출범했던 군인권보호관이 승주의 유가족을 다른 군사망 사고 유가족 및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불법 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한 일은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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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승주 일병의 어머니 안미자씨.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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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자·김진모·윤선영씨를 지난 5월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만났다. ‘윤 일병’(순직 뒤 상병 추서) 10주기를 맞은 소회와 그동안 악조건을 돌파해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10년을 전체적으로 돌아본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인터뷰 이틀 전, 김용원 인권위 군인권보호관 겸 상임위원이 군사망사고 유가족들에 대한 처벌불원서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윤일병 관련 재진정 사건에 대한 기각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인권위 건물에 들어간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을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은 지난해 10월 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로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자연스럽게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의 행태가 첫 화제로 올랐다.





“가해 병사보다 군인권보호관 김용원이 더 밉다”





― 김용원 위원이 뒤늦게 경찰이 아닌 검찰에 처벌 불원서를 냈어요. 서울 중부경찰서가 세 분포함 14명을 검찰로 송치한 이후입니다.



안미자(이하 안) : “더 기분 나빠요. 다른 유족들도 화가 나 있어요. 송두환 인권위원장이 서울 중부경찰서에 처벌불원서 냈을 때 난리 치더니 갑자기 검찰에 그렇게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김진모(이하 김) : “언론에 보니까 ‘경찰 조사를 통해 충분히 벌을 받는 등 자기들이 원하는 목적 달성했으니 처벌 불원서 내준다’는 식으로 얘기했던데 더 열이 받는 거죠. 김용원 위원이 냈던 수사의뢰서가 공개된 게 처벌불원서를 내는 단초가 됐다고 생각해요. 인권위 직원들까지 공범으로 적시했으니 주위에 신망을 더 잃었을 거예요. 오늘 그 처벌불원서에 대해 정보공개신청을 했어요. 두 주쯤 후에 나올 텐데, 불기소 결정이 나면 인권위 게시판에 공개할 겁니다.”



윤선영(이하 윤) : “얼마 전에 엄마랑 통화하는데 ‘이찬희보다 김용원이 더 싫다’고 했어요. 이거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이찬희 병장은 윤 일병 사건 가해 병사로 대법원에서 징역 40년형을 받고 현재 가해자 중 유일하게 교도소 복역 중이다.)



안 : “김용원씨, 할 말이 없어요.(말을 잇지 못함) 자식을 둔 부모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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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승주 일병의 큰누나 윤선영씨.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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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분 다 중부경찰서에서 각각 조사를 받으셨는데요.



윤 : “변호사 조력을 받아 웬만한 질문에 대해서는 진술 거부했어요.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다른 군사망사고 유가족분들께는 정말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난해 10월18일 인권위 15층 항의 방문은 ‘윤 일병 사건 재진정 각하’를 따지려고 했던 거고, 다들 마음을 모아 도와주려고 오셨는데 그것 때문에 피의자가 돼 버리셨잖아요.”



― 지난해 봄에 찍은 ‘세바시’(CBS 티브이 ‘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어머니가 나와 “군인권보호관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홍보해주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이 취임했을 때잖아요.



안 : “그분 취임하고 고 이예람 중사 아버님 등 군사망사고 유가족 7~8명이 김용권 군인권보호관에게 인사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근데 첫인상이 너무너무 안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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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승주 일병의 매형 김진모씨.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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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제가 그날 육군본부 고등검찰부 재판확정기록에서 찾은 28사단 검찰관의 두 개의 공소장을 보여줬어요. 둘 다 2014년 5월2일자이고 같은 검찰관이 작성했어요. 하나는 살인죄, 하나는 상해치사죄로 적혀있어요. (‘상해치사’에서 ‘살인’으로의 공소장 변경은 2014년 9월2일 28사단에서 이관된 3군사령부에서 이뤄졌다) 이게 뭔지 밝혀달라. 죄명이 다른 두 개의 공소장이 너무 이상하니까 김용원 군인권보호관 눈에서 광채가 나더라고요. 거기에 꽂히신 거예요. 이후 저에게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또 제가 진정인 조사도 받고 그랬죠. 근데 갑자기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경우라 각하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요?”





박정훈 대령과 너무 달랐던 10년 전 헌병대장





윤 : “우리가 뭐 해달라고 요구하면 진짜 100개 중의 1개나 들어줄까 말까 하잖아요. 이런 게 없으면 우리 의견을 관철하기 어려운데, 거기 항의 방문했다고 수사 의뢰까지 한 건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는 ‘입틀막’ 시리즈의 하나인 거죠.”



안 : “채 상병 사건이 나고 저희가 박정훈 대령 편을 드니까 갑자기 180도 태도를 바꿔 승주 사건 재진정 건을 각하시켰잖아요. 유족들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승주 사건 났을 때 박 대령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런 사람을 항명 수괴 죄로 잡아넣으면 안 된다고 유족들이 한마음이 된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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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 수사단장인 박정훈 대령(가운데)이 변호인단 중 한 명인 김정민 변호사(오른쪽) 등과 함께 지난 3월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군사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김정민 변호사는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하선우 병장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군인권센터를 통해 수사기록을 넘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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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과 ‘윤 일병’ 사건 때 수사한 헌병대장하고 비교하면 어떤가요?



김 : “2014년 4월, 28사단 헌병대장한테 ‘왜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기소하냐’고 하니까 ‘살인죄로 했다가 무죄가 나면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풀어줘야 한다’고 해요.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 같으면 ‘그래, 그러면 안 되니까 상해치사로 해서 안전하게 가야지’라고 생각하잖아요. 또 박정훈 대령과 같은 급이라 할 수 있는 28사단 위의 6군단 헌병대장은 제가 전화를 해서 ‘질식사 추정으로 나왔던데 멍 자국과 관련해 더 밝혀진 게 있냐’고 물었더니 ‘지금 나한테 수사지휘 하느냐’고 따지더라고요. 그래서 ‘유족 입장에서 장례식 끝나고는 볼 수 없으니까 궁금해서 그런다. 살인죄 아니면 살인교사라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저를 되게 핍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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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22일 고 윤승주 일병 유가족이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앞에서 이날 열린 국가배상소송 2심 선고를 마치고 나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쪽 두 번째가 어머니 안미자씨, 맨 오른쪽이 매형 김진모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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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훈 대령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데엔, 윤 일병 사건에 대한 학습효과도 있지 않을까요?



김 : “맞아요. 어쩌면 저희 사건의 영향이에요. 윤 일병 사건에서 박정훈 대령이라는 사람이 잉태됐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적자와 서자를 낳았다는 표현을 하거든요. 그게 박정훈 대령과 군인권보호관이예요. 근데 하나는 패륜아예요.(웃음) 박정훈 대령 변호하는 김정민 변호사는 윤 일병 가해자였던 하선우 병장의 변호인이었어요. 변호인으로 선임되는 조건이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용서받지 않으면 큰 죄 짓는다’는 거였어요. 하 병장 가족이 거기에 동의했던 거죠. 김정민 변호사 통해 군인권센터가 수사기록을 입수했던 거고요. 그렇게 박정훈 대령에 대한 내적인 동질감이 있는데 어떻게 그분을 버릴 수가 있겠어요.



내가 어느 매체에 ‘유족이 살인죄를 입증해야만 하는 비극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군가 또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망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니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싸워보라고 전하고 싶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근데 그분이 헌병대장(박정훈 대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처럼 싸우는 유족이 나올 줄 알았지, 같이 싸워주는 헌병대장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엄청난 성과예요. 저는 군인 빼고는 다 손잡을 생각이 있었거든요.(웃음) 근데 군인이랑 손잡는 일이 벌어지다니.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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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윤일병 폭행사망 사건 주범 이아무개 병장에 대한 살인죄 적용, 징역 35년형의 2심 판결을 파기환송한 2015년 10월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에서 윤일병의 어머니 안미자씨(가운데) 등 유가족들이 취재진에게 심정을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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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동안 가족들이 함께 지치지 않고 오셨는데, 쉽지 않잖아요. 동력이 뭘까요?



안 : “100% 우리 사위 덕분이에요. 사실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이게 무슨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한테 숨기고 싶었어요. 한 2년 정도는 커튼을 닫고 살았어요. 그러면서 나 자신을 속인 것 같아요. ‘아니야, 지금 걔 군대 가 있어. 유학 갔다고 생각하면 돼.’ 사위가 집요하게 파고들고, 헌병들한테도 막 꼬치꼬치 따지고 할 때도 ‘미운털 박혀서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군대랑 싸워서 승리한 사람이 없잖아요. 군사망사고 유가족들 가정 파탄 나는 것도 많이 봤고요. 그래서 제일 미안한 게 사위예요.”





초반 대처 못 하면 가족이 붕괴할 것 같았다





― 사위 김진모씨는 처남이 죽고 대학 강의도 그만두고 오로지 이 일에만 매진했다고 들었어요.



김 : “승주 부모님(장인, 장모님)이 처음에 상황 파악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저희 아버지가 진도에서 공무원을 하셨는데 허원근 일병(1984년 4월 화천 7사단에서 총기사고로 사망) 아버지를 잘 아셨어요. 어릴 때부터 군사망사고가 어떻게 은폐되는지 이야기를 들었고 198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김훈 중위 사건도 알거든요. 승주 사건도 딱 그렇게 될 법한 일로 보였어요. 사실 승주 부모님 의사가 제일 중요하지만, 나중에 정신 차렸을 때 아무것도 못 얻게 되면 가족을 보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가족이 붕괴하잖아요. 그걸 막기 위해서 시작을 했던 겁니다.”



: “저희가 결혼할 때 승주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저랑 16살 차이 나고 둘째 주영과 3살 차이가 나요. 그리고 또 우리 부부가 유학하느라 나가 있었으니까 친해질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승주는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교회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아이였어요. 순종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훈련소 퇴소식 때 보니 밝고 싹싹하더라고요. 간호학과 출신이라 의무대로 갔잖아요. 간호학과나 의무대, 다 상남자 이런 애들은 많이 없을 거라 여겼어요. 적응을 잘하겠지 했는데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죠. 승주가 의정부성모병원 있을 때 제가 남편한테 무릎 꿇고 빌었어요.(오열) 우리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데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안 : “딸이 남편한테 빌었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들어요.”



윤 : “아버지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고, 저랑 여동생은 잘 알지 못하니까. 근데 뭔가 잘못됐다는 건 승주의 몸을 보자마자 딱 알았거든요. 그래도 당신이 군대 갔다 왔으니까 당신이 해줘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부탁을 하니까, 남편이 알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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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6일 오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박석진씨가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윤일병 사건의 진상규명과 근본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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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그날부터 누구든 만났어요. 오라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연락하고 찾아내요. 관련된 분들은 꼭 연락을 주세요. 생업은 와이프가 제 몫까지 하고 있고요. 뭔가 어떤 정규직에 들어가면 통화를 하고 누구를 만나고 하는 일을 못 해요. 그게 다 주 중에 일어나잖아요.”



윤 : “접을 수밖에 없었죠. 갑자기 찾고 있는 서류가 계룡대(3군 통합 군사기지)에 있다고 하면 바로 계룡대로 달려가야 하니까.”



안 : “사위가 대법원도 맨날 갔어요.”



김 : “2015년에 3~4개월간 평일에 날마다 갔어요. 공판조서, 피의자 신문조서 등 1·2심 자료들 목록을 뽑은 다음에 한두개씩 신청해서 받아냈어요. 그걸 다 복사를 했지요. 대법원 복사실 사람들이 대법관처럼 깐깐해요.(웃음) 초임 변호사들이 복사를 편하게 하려고 복사 뭉치 끈 풀었다가 욕도 많이 먹어요. 그 사람들과 친해져서 나중에는 휴일에 따로 시간을 내서 제가 신청한 것을 더 꼼꼼히 챙겨 주시기도 했어요. 사단 헌병대에서 한 현장검증 동영상도 거기서 찾아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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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모·윤선영씨 부부의 집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윤 일병 사건 관련 문서들. 육본 고등검찰부 재판확정기록의 경우 6413쪽에 이른다고 한다. 전체 문서가 2만장이 훨씬 넘고, 대법원 등에서 파일형태로 현장검증동영상, 검시동영상, 검시사진파일, 피의자 참고인 신문영상 등도 받아냈다. 김진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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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개된 수사기록 “3장까지 보고 못 보겠더라”





― 2014년 4월에 사건 터지고 나서 수사기록에 전혀 접근을 못 했다고 들었어요.



김 : “처음 나온 ‘질식’이라는 사인에 대해서 따지면 ‘부모님이 가슴 아프게 뭘 다 알려고 하세요?’라는 식으로 군이 대응했어요. 승주 부모님은 서글서글하게 생긴 사람이 전담하고, 저는 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전담하고.(웃음) 저도 군대 갔다 와서 알지만 이 사람들이 장례식 끝나면 딱 사라질 사람들이거든요. 그 전에 뭔가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의문사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제가 2014년 7월10일 부검의 증인신문을 보고 ‘뭔가 하지 않으면 이대로 질식사로 끝나겠구나! ’생각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10년은 군대와 싸워보자고 결심을 했어요. 그때부터 최초 보도자료부터 시작해서 수사기록까지 다 요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윤 : “수사기록을 진짜 한장이라도 얻고 싶었거든요. 계속 재판 중이었으니까. 재판 끝나면 다 공개해주겠다고 했는데, 왠지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2014년 7월에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이 나타나 수사기록을 공개한 거죠.”



안 : “저는 태극기 부대까지는 아니지만 국민의힘 입당 원서를 쓸 정도로 보수적인 사람이었어요. 참여연대에서 전화 오면 ’그런 단체 제일 싫어한다’고 전화 끊고. 그러다가 군인권센터 덕분에 수사기록을 본 거예요. 딱 3장까지 봤나, 더 이상은 못 보겠더라고요. 폭행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다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어요. 왜 그렇게 온갖 핑계를 대면서 수사기록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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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4일 오후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육군 28사단 윤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발표문을 읽은 뒤 고개 숙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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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가장 고마운가요?



김 : “(처음 폭행 제보를 해준)김재량 상병이죠. 김 상병의 폭행 제보가 없었다면 이 견고한 국방부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거예요. 4월6일 밤 10시40분에 폭행 신고를 함으로써 군 간부들이 승주의 가슴에 난 멍을 봤는지 안 봤는지가 중요해 지거든요. 다들 4월7일 아침에 폭행 사실을 알았다고 했어요. 민사(국가배상소송) 1심의 쟁점은 군 간부들이 4월6일에 폭행을 인지했느냐 안 했느냐예요.”



― 정보공개 청구를 엄청 하셔서 자료를 받아내셨는데, 원래 그렇게 집요한 스타일인가요?



김 : “제가 독일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는데, 자료가 하나가 있으면 부족한 걸 다 모아야 직성이 풀려요. 근데 이거는 군대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간부들의 행동과 말이 이상했어요. 저는 병원에 가자마자 처남 몸에 있는 멍을 보고 디지털카메라로 다 찍어놓기도 했는데, 그분들은 못 봤다는 거예요. 옮기는 중에도 못 봤다는 거예요. 한 명뿐만 아니라 아무도 못 봤다는 거예요.”



윤 : “자기네들이 폭행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걸 못 봤다는 거였죠.”



김 : “정보공개 청구나 재판 중 문서송부촉탁(법원을 통한 공공기록 조회 요청)을 통해 얻어낸 각종 (피의자, 참고인, 증인) 신문조서를 조합해서 퍼즐을 맞추면 세부적으로는 저희 주장이 다 맞았어요. 그런데 판결 등 최종판단에는 저희 주장이 인용되지 않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충분히 제가 생각한 것들은 증명해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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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1일 윤 일병이 폭행으로 사망한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포병부대에서 12일 부대원들이 내무반에 모여 인권교육을 받고 있다. 이날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들이 이 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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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병 사건 수사와 같은 점, 다른 점





― 국가배상소송은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이찬희 병장 책임만 묻는 거로 끝났어요.



김 : “사법기관은 너무 좁게 보는 거 같아요. 저희도 준비 서면 열 몇 개씩 냈는데, 저희 거는 하나도 인용을 안 하고, 상해치사 공소장은 다 ‘군 검찰의 직무권한 범위안에 있고 헌병대는 다음날 폭행을 인지하고 즉시 수사에 착수했으니 잘못이 없고, 부검의는 의무기록지에 나와 있는 과다출혈의 증거들을 못 보고 질식사 추정이라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사실 의무기록지도 부검에 필요하다고 해서 그날 제출했었거든요. 그냥 자기들 진급 못 할까 봐 사인을 질식으로 덮고 간 거잖아요. 채 상병 사건에서 임성근 사단장과 국방부, 용산의 커넥션과 똑같아요. 국방부가 중간에 경북경찰청에 이첩한 수사기록을 다시 빼 오는 게 드러나잖아요.



저희 때는 내부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지휘관에서부터 군의관, 부검의, 군 검찰, 헌병, 육본, 국방부 모두 한목소리처럼 질식사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근데 딱 그 몸에 멍이 든 사진을 본 순간 아무도 질식사라고 이야기 못 하잖아요. 제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이 공개되니까 한 달도 안 돼서요. 그리고 2014년 9월2일 공소장 변경하면서 사인도 바뀌고 죄명도 다 바뀌잖아요. 근데 민사(국가배상소송) 2심에서 딱 이러는 거예요. 넉 달 동안 꾸준히 조사가 이뤄져서 사인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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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8월4일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28사단 윤일병 구타사망사건에 대해 따져 물으며 윤 일병의 주검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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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유족들이 헌병대 수사과장, 헌병대장, 부검의, 헌병대 검찰관, 의무대 지원관 이렇게 5명을 사인 축소·은폐 혐의로 고소했지만 다 불기소처분됐어요.



: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래도 저희가 10년 싸우면서 바뀐 점이 있어요. 제가 470건 정보공개 신청하면서 요령이 생긴 게 그 사람들 틈이 보일 때가 있거든요. 박정훈 대령 때문에 국방부 검찰단이 욕을 엄청 먹을 때 불기소처분 사건기록을 다 받아냈어요. 그 기록을 보면 승주가 거쳐 간 병원 의료진들 다 조사했던데 국군양주병원 군의관이 쓴 ‘입에서 음식물이 나왔다’는 그 기록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아는 거예요.



하지만 처벌은 안 하고, 대신 다른 걸 해줘요. 가령 이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군이 고등군사법원을 폐지했어요. 제도변화를 해주는 거죠. 제가 사단장 포함 30명도 고소한 적 있어요. 불기소되면 재정신청할 때마다 뭔가 하나씩 바뀌는 거예요. 심판관 제도가 폐지되고, 병사들 월급이 오르고, 핸드폰 사용이 허용되는 등 개선되는 느낌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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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윤승주 일병.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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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뭐가 남았나요?



김 : “김용원 위원이 각하시킨 윤 일병 사건 축소·은폐 의혹 재진정 건에 대해 인권위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각하처분 취소청구)을 신청했고, 3월5일에 기한을 30일 연장한다고 통보받았는데 아직 아무 통지도 못 받았습니다. 근데 인권위는 이미 2015년에 윤일병 사건 축소에 관해서 국방부에 수사 의뢰한다는 결론을 내놓았어요. 이에 관한 조사관 보고서를 정보공개 청구해서 받았어요. 하지만 이건 당시 결정문에 들어있지 않아요. ‘공개할 경우 조사관이 공개에 대한 부담 내지 심리적 압박으로 적극적인 사건조사 또는 자유로운 의견개진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우려가 있어 사건정보공개에 어려움이 있다’는 내용의 비공개 사유서를 예전에 보냈었거든요. 근데 1월4일에 이 문서가 우연히 저희 손에 들어온 거예요.”



― 지금 세 분 모두 인권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김 :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싸우는 과정을 통해 고등군사법원의 민간 이양 등 얻은 게 있잖아요. 이건 법령으로 정해졌지만, 문제는 이걸 지켜내는 사람이에요. 군에서는 비어 있는 구멍들을 잘 이용하잖아요. 채 상병 사건 때도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개입합니다.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안주하고 감시 안 하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요. 그게 제일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만들어졌어도 빈틈이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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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충현당에 안치된 윤승주 일병 유골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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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쟁취해낸 기록 통해 도움 주고 싶어





― 채 상병 가족은 본 적이 있나요?



안 : “아직도 얼굴을 드러내시지 않아요. 지금도 혼수상태 같지 않을까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거예요.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릴 거예요. 이해합니다.”



― 다른 군사망사고 유가족들한테는 어떤 말씀을…



안 : “정말 지금도 언론에 나오지 않아 그렇지, 너무 힘든 사람들 많거든요. 지금 만나는 사람 중에도…(눈물) 우리가 재판하고 그럴 때 참석해줬던 사람들이 지나고 나니까 너무 힘이 되고 고마웠어요. 그게 큰 의지가 돼요. 혼자 싸우는 것 같은 소외감, 고립감이 있어요. 그럴 때 용기 내라, 힘내라 하면서 재판하는 곳 찾아가고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이가 70인데 천국에서 승주를 만났을 때 ‘그래 엄마 그동안 애썼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 지금 감옥에 가해자는 이 병장 한 사람밖에 없어요.



안 : “잊고 싶어요. 진짜, 그 이름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김 : “승주가 2018년 1월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았어요. 이것도 쉽지 않았어요. 일일근무명령서라는 게 있는데, 4월 4~6일 치가 폐기된 거예요. 정보공개신청을 해도 군에서는 그날 치가 없다고 했어요. 없을 수가 없잖아요. 제가 행정재판하고 싸운 끝에 ‘패턴으로 봤을 때 그날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처분 이유서를 받아냈거든요. 보훈처하고 비슷한 문제로 소송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게 뒤집힐 수도 있구나. 진짜 되게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판결문이 나오거나 이럴 때 퍼블릭하게 오픈해서 다른 사람들이 판례로 쓸 수 있게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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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승주씨의 어린 시절. 오른쪽은 작은누나 윤주영씨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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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끝난 뒤 어떤 감정이 몰려올지 걱정





기적 같은 10년이었다. 엄마의 눈에 벚꽃이 안 보일 때, 이들 가족의 눈에 앞으로의 10년이 보일 리 없었다.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거짓말과 싸우며 그 10년을 견디고 헤쳐왔다. 인터뷰하면서 이들에게선 어떤 여유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것을 ‘성취감’이라고 부르기엔 적절하지 않다.



정보공개신청으로 승주와 관련된 문서들을 낱낱이 찾아내고, 민·형사소송을 승소로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군 인권과 관련한 여러 제도변화를 끌어냈다. 이는 성취감이 아니라, 군대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지지 않고 진실의 조각을 찾으려 했던 어떤 안간힘의 결과였을 것이다. 김진모씨는 “이 과정이 끝났을 때 우리 가족에게 어떤 감정들이 훅 몰려올지 모른다. 그게 두렵다”고 했다.



승주 엄마 안미자씨는 “앞으로 소외된 사람, 그리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지체없이 달려가는 그런 삶을 살겠다.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큰누나 윤선영씨도 “동생처럼 인권이 말살돼 죽는 군인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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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승주씨의 입대 전 대학 시절. 앞줄 맨 왼쪽이 윤씨.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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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군대에서 100여명이 죽는다. 김진모씨는 “채 상병 사건을 보면서 윤 일병 사건을 통해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예전과는 달리, 군사망사건 수사가 군사경찰 안에 갇히지 않으면서 최소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진행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스템과 무관하게 개입해 들어오는 어떤 입김이라고 했다. 채 상병 사건에선 입김을 행사한 장본인들의 리스트에 국방부 장관 이종섭, 국방부 법무관리관 유재은을 넘어 대통령 이름까지 오르내린다.



안미자·김진모·윤선영씨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떤 죽음이든 은폐되거나 조작되지 않고, 가해자가 온전히 처벌받는 걸 기본으로 만드는 게 우리 가족의 사명입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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