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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죽음이란 연결 에너지의 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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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시간의 방향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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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의 증가는 시간의 방향이다.”



- 스티븐 호킹(1942~2018)-





이는 죽음의 법칙을 말한다. 엔트로피의 증가와 시간의 흐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우주의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는 의미다. 엔트로피 법칙은 증명이 필요 없는 자연 현상의 기술이면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반박 불가의 도그마기도 하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도 안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의 시공간도 엔트로피 법칙이 지배한다. 공간은 마음대로 오가지만, 시간은 마음대로 오가지 못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에 실려 사람도 문명도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루게릭병으로 사지가 마비된 스티븐 호킹도, 육체 대신 반짝이는 지성으로 우주를 통찰하고 엔트로피 법칙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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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는 문명이 생태계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럼에도 문명은 생태계에 강력하게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문명을 통해 생태계를 지배하지만, 생태계를 떠나서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문명이라는 울타리는 생태계에서 집단 진화를 시작한 인간의 상호작용이 자기조직화되어 창발된 복잡계다. 문명을 지속시키는 자기질서가 무너지면 혼돈계를 거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문명의 다음 단계이거나, 아니면 최종 장이 될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환경 변화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을지, 아니면 혼란이 임계치를 넘어 소멸로 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문제를 같이 고민하기 위해 이번 칼럼부터는 이전에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적 관점에서 문명을 다뤄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엔트로피, 복잡계, 창발, 자기조직화 등 생소한 용어부터 하나씩 알아보자.



생태계와 문명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 정의부터 확인해야 한다. 과학자와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속이 터지는 이유가 단어를 따지려 드는 직업병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정확한 단어의 정의와 개념이 명확한 소통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서, 달이 개념이고 손가락은 용어다. 달을 가리키는데 별을 쳐다봐도 소통이 안 되고, 손가락만 계속 쳐다봐도 소통할 수 없다. 소통이 안 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소통했다는 착각이다. 숙제를 금일까지 제출하라 들었는데 금요일로 착각하던지, 다음 회의는 사흘 뒤라는 것을 4일 뒤로 착각하는 것 등 웃지 못할 상황은 일상에서도 일어난다.



특정 학문 분야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정의를 통해 특정 개념을 추상화한 것이다. 개념을 모르는 단어로 소통하는 것은, 한국어와 영어로 대화하기만큼이나 어렵다.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면,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분명 아는 단어이고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잘못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라도 분야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현상은 학문 분야가 세분될수록 더욱 심해진다. 이런 전문 분야 용어를 자곤(jargon)이라 한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뭔가 들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심정을 표현하는 단어다. 소통을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비속어와 비슷하지만, 비속어와 다르게 자곤은 정의를 먼저 이해하면 오히려 명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서양에서 발달한 과학 용어를 번역해 쓰는 우리는 개념 혼란에 더 쉽게 노출된다. 분야를 망라하고 전공 서적은 번역서가 원서보다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명 한글이고 읽을 수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의 대부분은 용어의 혼란에서 발생한다. 많이 사용되는 미디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도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 언론 매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생물학 분야에서는 세포 배양에 사용하는 영양 배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산 분야에서는 메모리 카드 같은 정보 저장 수단을 의미한다. 미디어(media)는 중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medium’의 복수형이다. 신문의 경우 사람 ‘중간’에서 소식을 전달. 배양액의 경우는 세포의 ‘중간’에서 상호작용하는 물질, 저장장치의 경우는 정보를 이동하는 ‘중간’ 매개체, 이렇게 모두 중간에서 파생된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맥락을 통해 적절한 개념 파악이 가능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배경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외래어 남발은 주의해야 하지만, 언어의 본질이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말 번역이 애매한 과학 용어는 외래어 사용이 더 효율적이다. 그런데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으면서, 적절한 번역이 어려운 대표적인 외래어가 엔트로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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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학생 엔트로피는 수업 시간에는 낮아지고 쉬는 시간에는 높아진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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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란 무엇인가





대표적인 엔트로피 정의는 ‘계의 무질서도’다. 일단 계는 집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하진 않아도 포괄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 1865년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처음으로 엔트로피 개념을 도입한 이래, 열역학과 물리학을 시작으로 정보학, 생물학, 그리고 사회학까지 그 개념의 적용이 확장되면서 재정의가 이루어져 왔다.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개념이 반복적으로 재정의가 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적용 분야에 따라 미묘한 관점 차이라는 부작용도 생겼다. 그 결과 엔트로피는 많이 공부할수록, 머릿속이 무질서해지는 이름대로 묘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한 개념을 무리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간단하지만 2% 부족한 ‘계의 무질서도’로 엔트로피를 정의하고, 대신 필요한 경우에 추가 개념을 확인하도록 할 것이다.



교실을 계라고 하면, 엔트로피는 수업 시간에는 낮아지고 쉬는 시간에는 높아진다. 수업 시간 조용한 교실에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가 쉬는 시간에 방출되는 것이다. 쉬는 시간 학생 등의 격렬한 자유 에너지는, 수업 시간 학생과 의자를 붙여놓던 연결 에너지에 반비례한다. 이처럼 교실이라는 계에 내재한 연결 에너지의 총합을 엔탈피(enthalpy)로 정의한다. 수업 시간 엔트로피는 낮고 엔탈피는 높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엔트로피는 높아지고 엔탈피는 낮아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엔트로피와 엔탈피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질서와 에너지라는 물리량을 서로 상보(상호 보완, complementary)적으로 기술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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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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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





이제 엔트로피 개념이 등장한 배경을 살펴보자. 고전 소설은 재미가 없지만 당대의 환경과 작가가 소설을 쓴 배경을 알면 흥미가 배가 된다. 딱딱한 과학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 개념이 등장한 배경을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산업혁명 시기의 증기기관은 최첨단 과학기술이었다. 인류 문명이 도약한 에너지 혁명의 중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대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은 모조리 증기에 관한 연구에 뛰어들었다. 더 효율적이고 출력이 높은 증기기관을 만들기 위해 먼저 증기의 특성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증기의 열과 압력과 부피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면서 열역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열역학 현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이 확인된다. 열역학의 제1법칙은 그 유명한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를 오가지만 총합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 용어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열역학의 제2 법칙은 시간이 흐르면 엔탈피는 낮아지고,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엔탈피와 엔트로피는 상보적이지만, 엔탈피는 측정이 어렵고 엔트로피는 관찰을 통해 측정이 용이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엔트로피를 중심에 두고 ‘자연은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라고 기술하였는데,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과학자들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단정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무한동력 이야기는 예외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무한동력에 대한 특허는 제목만으로 접수단계에서 거절된다. 열역학의 법칙 때문에 무한동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동력이 가능하다면 열역학의 법칙이 깨진다는 의미다. 그럼 산산조각이 난 그릇이 원래 모습으로 붙기도 한다. 커피를 타서 마시려는 순간 커피와 설탕이 분리되기도 한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도 있어야 한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살아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당연함을 말하는 과학의 표현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누구도 이 법칙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르는 자연 현상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생명 현상을 정의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반대라는 것은 자명하기에, 과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면 생명은 그 반대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엔트로피 법칙을 이용해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죽는 대상을 먼저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의 대상은 계(system)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계인 우주의 죽음도 정의가 가능하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엔트로피가 최대에 도달하면 죽는 것이다. 우주가 죽었다는 것은 만물을 생성하는 기본 입자의 연결 에너지가 모두 엔트로피로 전환된, 도달할 수 있는 무질서의 최고 상태이다. 이는 모든 물질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물질이 에너지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처음 찾아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고, 그의 이론은 이미 핵폭탄을 통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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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연결에너지의 소진을 의미한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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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저항





현실의 시공간으로 돌아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된 철학의 단골 메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규정했지만, 그중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필멸성(mortality)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그가 확립한 삼단논법 기본 예시의 출발 명제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반박 불가한 생태계의 도그마다. 앞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먼 미래에나 일어날 우주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죽음은 우주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주의 죽음의 대상이 계인 것처럼 인간의 죽음의 대상은 개인의 실존인 인체다. 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 피부로 구분되는 엄연한 물리적 실체다. 세포가 모여 사람을 이루고, 세포는 다시 생체고분자라는 유기물로 구성된다. 물리적 관점에서 사람도 연결 에너지가 필요한 유기물 집단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계는 구성 요소의 연결을 유지하는 연결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람을 구성하는 분자,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 소립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 모두 고유의 연결 에너지가 존재한다. 인간의 죽음은 인체를 구성하는 구성 요소의 연결 에너지가 감소하면서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는 현상이다. 인체의 연결 에너지가 소진되면 인체의 유기물은 엔트로피 증가로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다른 생물에 흡수되어 새로운 계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처럼 어떤 계의 구성 요소가 다른 계의 생명으로 연결되는 미디어가 죽음이기도 하다.



생명이란 엔트로피 법칙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현상이다. 우주의 시공간에 속박된 사람이라는 존재도 죽음을 향해 끝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생명은 에너지를 사용해 자신을 구성하는 연결을 유지해서 엔트로피를 쉴 새 없이 낮춘다. 우리는 숨만 쉬어도 이미 에너지가 충만한 존재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표현처럼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밥에 대한 인사말이 많다. 경험을 통해 엔트로피 법칙을 깨우치게 된 조상의 지혜인지 모르지만, 음식에서 얻은 에너지로 세포와 신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연결을 새로 만들고 보수한다. 자연으로 품으로 돌아간다는 표현도,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을 멈추고 순응하는 죽음의 과학적 비유다.



우리가 확인한 엔트로피 개념은 문명과 집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가족, 친척, 친구, 회사, 동창, 종교, 동호회 등등,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은 타인과 상호작용을 통해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집단은 구성원의 연결을 위한 노력으로 지속된다. 만약 연결을 위한 구성원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그 집단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소멸한다. 다양한 형태의 노력이 모두 집단의 연결 에너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도 에너지고, 동호회에 납부하는 회비도 에너지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에도 신경세포를 작동시키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타인과 연결을 위해 투입되는 모든 유무형의 노력이 집단 엔트로피를 낮추는 연결 에너지다. 자주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말처럼, 친한 사이일수록 더 많은 연결 에너지가 필요하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건 문명이건 우주에 실존하는 계는 공짜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결을 위한 노력이 멈추면 죽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존재와 소멸의 대상인 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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