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8 (화)

인종차별 족쇄 벗겼지만…여전한 불평등 [뉴스룸에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로콰네에서 조깅을 하는 이들이 아프리카민족회의 선거 광고판 아래를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조기원 | 국제부장



“우리에게 씌워졌던 족쇄는 벗겨졌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각)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악명 높은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등을 기념해 제정된 ‘자유의 날’ 30돌 기념식에서 “몇 세기 동안 우리를 억눌러왔던 억압의 무게는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지 못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의 말대로 흑백 거주 구역을 분리하고, 인종 간 혼인을 금지하며 인종 간 성행위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았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30년 전인 1994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라마포사 대통령이 속한 정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1994년 4월26~30일 처음으로 모든 인종이 참가한 총선에서 62.65%를 득표해 제1당으로 올라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뒤 남아공의 미래를 이끌어왔다. 새로 구성된 의회는 총선 다음달인 1994년 5월 남아공 흑백 차별 철폐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넬슨 만델라를 새 대통령으로 뽑았다. 남아공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뽑힌다. 만델라 대통령은 백인 정권 시절 인권 탄압에 대해 진실은 밝히지만 화해를 추구해 대규모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일부 백인들의 우려를 덜어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총선에서 한번도 정권을 놓치지 않았다. 만델라 이후 타보 음베키, 칼레마 모틀란테, 제이컵 주마 그리고 현직인 라마포사까지 모든 대통령이 아프리카민족회의 소속이다. 음베키 대통령은 2008년 9월 직권남용 의혹으로 불명예 하차했다. 주마 대통령은 부패를 포함해 780건 넘는 범죄 혐의를 받다가 2018년 2월 사임했다. ‘부패 척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주마 사임 뒤 대통령 자리에 오른 라마포사 대통령도 비리 의혹이 인 전력이 있다. 2020년 2월 림포포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 현금다발로 보관하던 400만달러(약 52억원)를 강도에게 빼앗길 뻔한 사실이 알려진 이른바 ‘팜게이트’다. 의회에서 탄핵소추위원회 설치 표결까지 열렸으나 다수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 반대로 위기를 넘겼다.



이런 여러 게이트에도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줄곧 선거에서 승리해왔다. 1948년부터 40년 넘게 지속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을 이끌어온 이 명망 있는 정당에 대한 남아공 국민의 지지는 굳건했다.



하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여론조사 기관인 입소스가 지난달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아프리카민족회의 지지율은 40%를 간신히 넘은 40.2%였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30%대로 내려갔다. 오는 29일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이 여론조사대로라면 30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아직도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한 주마 전 대통령이 신생 야당 움콘토 웨 시즈웨(MK)당을 창당해 총선에 출마한 점도 아프리카민족회의에는 골칫거리다. 정권을 유지하려면 연정을 구성해야 할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는 배경에는 끊임없는 지도부의 부패 스캔들과 함께 쉽게 개선되지 않는 남아공 경제 상황이 있다. 남아공 실업률은 지난해 4분기 기준 32.1%이며, 15~24살 청년층 실업률은 60.7%에 달했다.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소득분배지표인 지니계수(완전 평등한 경우가 0이고 완전 불평등한 경우는 1)는 지난해 기준 0.63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은행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지역 5개 국가가 가입한 남아프리카관세동맹이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지역이라며 “개인이 거의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유전적 환경(기회의 불평등)이 전반적인 불평등을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하네스버그에 거주하는 탄데카 음바칼리(28)는 알자지라 방송에 부모 세대 때와 삶의 여건이 달라지지 않았다며 “방 하나짜리 집에 10명이 살고 그중 직업이 있는 이는 2명 정도”라고 말했다.



라마포사 대통령도 자유의 날 기념 연설에서 “우리는 많은 진보를 이뤘지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억압적인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뒤에도 진보를 이뤄내기 위해선 지극히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남아공의 오늘이 보여주고 있다.



garden@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