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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내 방, 내 집 가꾸며 곱씹다… 자기 돌봄이 나다움의 시작[2030세상/배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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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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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집 안 가요’라는 아가씨의 말, ‘본전도 안 남아요’라는 상인의 말,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는 어르신의 말이 세상 3대 거짓말이라는 오랜 유머가 있다. 나는 여기에 ‘저희 집처럼 해드릴게요’라는 도배사의 거짓말을 하나 더 보태고 싶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무턱대고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정작 도배사의 집이 완벽하게 도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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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슬 도배사·‘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도배사가 사는 집은 비싸고 좋은 벽지에 최고의 기술을 사용해 완벽하게 도배가 되어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도배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초보 시절 자기 집에 도배 연습을 하느라 도배지가 틀어지고 들뜨는 등 하자가 생기거나 다른 집 도배 후 남은 벽지를 조금씩 가져와 붙이는 바람에 벽과 방마다 갖가지 다른 벽지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소비자의 집에 적용해 보기 어려운 새로운 시공 방법을 시도해본 탓에 무언가 엉성하게 마무리된 경우도 있다. 심지어 초배지만 바른 채 사는 도배사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유는 역시 일하느라 바쁘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 자기 집 도배는 미루다가 미처 하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일 것이다. 매일같이 다른 사람의 집을 완성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집은 대충 도배해 놓고 사는 도배사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도배를 하면서 내가 도배한 곳에 누군가 들어와 살게 될 생각을 하면 보람이 있다. 공간에 관심이 많고 특히 쉼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늘 생각하는 편이기에 내가 작업한 곳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하지만 정작 내 공간과 내 쉼에 대해서는 많이 놓치고 있었다. 늘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내 방 내 집의 도배는 마감 불량이어도 못 본 척 지나쳤고, 바쁜 일에 치여 온전하게 쉼을 누려야 할 내 공간을 돌보고 가꿀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공간만 채우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 고갈되고 비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먼저 누리고 스스로를 채워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 방 내 집을 가꾸기 시작했다. 초보 도배사일 때 현장에서 남은 벽지를 얻어 와서 서툴게 혼자 작업한 탓에 마감이 온전하지 않은 벽지들을 떼어내고 내가 직접 고른 깨끗하고 예쁜 새 벽지를 붙였다. 낡고 오래된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겨 정리하고 마음에 드는 새로운 가구도 몇 가지 들여놓았다.

사실 공간을 채우는 것 말고도 스스로 돌보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챙겨야 하고, 취미생활이나 대인관계를 위한 시간도 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에 대해서도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직업 활동이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다른 일과는 달리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더 미뤄 왔던 것 같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간을 쓰고 때로는 돈도 쓰고 공을 들여야 한다. 나는 이제야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잘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보며 사는 일, 나다운 삶의 시작이 아닐까.

배윤슬 도배사·‘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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