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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잊지 못할 생일선물[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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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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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가족들이 차려준 생일상을 선물 받았다.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나 사랑받고 있구나 행복해했다. 문득 스물다섯 살 생일이 떠올랐다. 내 생일 즈음에는 벚꽃이 봄눈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정작 학창 시절에는 생일을 편히 누려본 적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늘 생일은 시험 기간이라서 공부하기 바빴다. 특히나 대학 시절에는 학비를 버느라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해야 했기에 더욱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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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리 에세이스트


스물다섯 살의 나. 거기에 취업준비까지 더해 초조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남들 보기엔 바쁘고 씩씩한 취업준비생이었지만, 속은 불안한 촛불처럼 흔들리며 타들어 갔다. 몇 번의 시험과 면접에서 낙방하고 밀려든 열패감과 열등감에 후드득 자존감이 떨어졌다. 게다가 돈이 없었다. 나 하나 먹이고 공부하고 구직 활동하는 데 이리도 많은 돈이 드는지 몰랐다. 한 달 생활비보다도 비싼 면접용 정장과 구두를 사면서 마음이 구깃해졌다. 아무래도 초라한 나를 나조차도 좋아할 수 없었다.

창밖은 봄. 하지만 한가하게 꽃이나 볼 여유가 없었다. 밤을 새우며 시험 공부와 취업 준비 뭐든 하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일이라는 감흥도 없이 나는 시들어 있었다. 그때 친한 후배가 잠깐 학관 휴게실에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후배는 방그레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러고는 “생일 축하해요!” 예상치 못하게 가방에서 보온 도시락을 꺼냈다. 학창 시절에나 들고 다녔을 법한 동그랗고 빨간 보온 도시락이었다. “언니 자취하잖아요. 미역국도 못 챙겨 먹었을까 봐 만들었어요. 아직 따뜻해야 할 텐데.”

전 어제 시험 끝났거든요. 언니 생일은 항상 시험기간이라 제대로 축하도 못 받잖아요. 미역국 먹으면 시험 미끄러진다는 거 그거 다 미신이야. 언니는 무슨 시험이든 잘 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후배가 싹싹하게 조잘거리며 층층이 반찬통을 꺼냈다. 꽃잎처럼 동그랗게 모인 밥과 계란말이와 반찬들, 그리고 미역국. “좋은 날 잘 태어났어요.”

후배와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따뜻한 흰밥에 미역국을 떠먹으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 내 앞에 너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고마워.” 고맙단 말로는 턱 없이 부족한 고마움을 꼭꼭 곱씹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태어나길 잘했다. 힘내야지. 잊지 못할 생일선물이었다.

도시락을 나눠 먹고 같이 교정을 걸었던 후배는 잘 살고 있을까. 흩날리던 벚꽃 눈을 맞으며 걷던 우리. 따스하게 등을 안아 주던 봄볕에 담담한 척 먹먹했던 걸음을 기억할까. 그렇게 발맘발맘 걷다 보니 끝없는 터널 같던 시기도 무사히 지나왔다고. 한 시기를 지나온 지금에야 나는 단순한 진실을 깨닫는다. 나 자신조차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사랑받고 있었음을. 그럴 때조차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었음을.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잘 태어났다고, 다시 힘을 내라고 따뜻한 밥을 챙겨 먹이는 마음. 그건 선물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오래 간직해 온 선물을 꺼내볼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잘 살아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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