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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다시 한번, 편지의 시대는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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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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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편지의 시대’(장이지 지음, 창비)라는 시집이 나온 걸 보고 편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편지의 시대가 간 지 오래지만 ‘편지의 시대’라는 말을 책 한 권으로 마주함으로써 뒤늦게 어떤 충격이 전해졌던 것이다. 구한말이나 개화기라는 말처럼 ‘편지의 시대’라는 말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시대를 호명하고 있기도 하다고 느껴서다.

거리에서 우체통을 볼 때마다 씁쓸한 감정이 들었던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루에 몇 통의 편지나 우체통에 넣어질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편지가 넣어질까? 일주일 동안 한 통의 편지도 넣어지지 않기도 할까? 넣어진 편지는 제대로 수거가 될까? 나는 우체통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아니면 관광지의 우체통처럼 상징인지 또 아니면 공중전화 박스처럼 철거하지 못하고 버려진 건지 궁금했다.

우산을 쓰거나 눈밭을 걸으며 우체통으로 걸어간 기억이 내게는 있다. 내게 편지를 보낸 친구에게 쓴 답장을 들고서였다. 비와 눈에 젖어 주소가 번지거나 편지 봉투가 찢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소인을 찍을 공간을 남겨두고 비닐 테이프로 코팅한 편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내게 방학이면 집으로 편지를 보내주던 친구가 있었기에 할 수 있던 일이다. 우체통을 지날 때면 편지를 들고 우체통으로 걸어가던 내가 떠오른다.

‘편지의 시대’에 실린 ‘외워버린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당신은 내 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오, 나의 당신, 귀 안에 느껴지는 당신의 필압(筆壓)” 편지를 보내 온 상대가 필기구로 편지지를 꾹꾹 눌렀던 압력을 귀 안에서 느낀다는 거다. 필압까지는 아니어도 나도 친구의 편지를 받고서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런데 개학하고 만난 친구는 귓가에 속삭이던 그 다정한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방학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는 원래 친구가 아닌 내 마음속에서 이상화된 가상의 친구였던 것이다.

어디 나만 그랬을까. 친구도 나를 보고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의 나보다 글 안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라서다. 내가 아끼는 책 중의 하나인 ‘필담’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쓰지 선생님은 제가 상상한 대로의 분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쓰지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여자한테 편지를 쓰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제가 쓰지 선생님이 편지에 쓰신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2003년 국내에 번역된 ‘필담’(김춘미 옮김, 현대문학)은 두 소설가인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가 1996년부터 1997년까지 1년 6개월간 주고받은 편지를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1998년 일본에서 발간되었을 때의 광고 문안에 따르면 유머 넘치게 독서의 기쁨을 전하며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킨 농밀한 왕복 서간집”이다. 광고 문안이란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 책에는 유머, 기쁨, 농밀함 모두 있다. 그렇기에 ‘내가 아끼는 책 중의 하나’라는 표현을 썼다.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다. 앞으로도 복간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는 두 작가가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하며 기쁨을 나누는 왕복 서간집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메일로 뭔가를 쓸 수도 있지만 이메일은 편지가 아니다. 우표를 붙이지도 않고, 필체나 필압도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보낼 수 있고, 상대가 읽었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메일은 거리감이 희박하다. 수십 년 나이 차가 있는 ‘필담’을 쓴 두 작가는 안면이 없는 채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재가 끝날 때 만나기로 하지만 결국 만나지 않기로 한다. 서로를 특별한 사람, 현실이 상상력을 침범할 수 없는 불멸의 존재로 두기 위해서다.

농후한 인간 둘이 주고받은 ‘필담’을 읽으면서 나도 저런 편지를 주고받을 미래의 인물을 기다렸다. 하지만 편지의 시대는 끝나버렸고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 편지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이 시대, 작가들이 쓴 서간집을 쌓아놓고 읽는 것으로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편지에서만 읽을 수 있는 어떤 벅차오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가랑비와 아지랑이 속에서 남은 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박제가가 딱 이맘때 쓴 이런 문장은 메일에는 도저히 쓸 수가 없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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