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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박영선 총리' 카드 수긍할 만하나 꺼내든 방식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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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메시지 관리 실패로 '불통' 이미자만 키워

험난한 정치지형 속에 야당 협조 절대적 필요

박 전 장관, 장점 많고 '반도체 총리' 가대감 커

야당에 비서실장 통한 물밑 제시 후 동의 필요

이재명 대표 국정운영 파트너로 인정부터 해야

“의대생 2000명 증원과 관련해 협상 여지를 둔 것이다?”, “아니, 타협 불가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4·10총선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니, 옳은 정책 방향인데, 국민이 잘 몰라준다는 뜻일 뿐이다?”

세계일보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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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총선을 9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고 할 때만 해도 전공의 집단사직에 따른 의료사태 해결에 분기점이 마련되기를 기대한 이들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 51분간에 걸쳐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으나 반응은 혹평 일색이었다.

윤 대통령은 연설 대부분을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면서 2000명 증원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의료계가 증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집단행동이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안해야 마땅합니다.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은 늘 열려 있는 법입니다.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 근거가 제시된다면 정부 정책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법입니다.”

1만4047자 원고의 중간에 있는 이 192자 문단만으로 누가 협상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방송에 출연해 “2000명 숫자가 절대적 수치란 입장은 아니다. 다만 오랜 기간 동안 절차를 거쳐 산출한 숫자이기 때문에 이해 관계자들이 반발한다고 갑자기 1500명, 1700명 이렇게 근거 없이 바꿀 순 없는 것”이라며 “그래서 (의료계가) 집단행동을 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 조정안을 제시해 주면 낮은 자세로 이에 대해 임하겠단 뜻”이라고 설명하고서야 뜻이 명확해졌다.

총선 결과 범야권 192석의 여당 참패로 끝나면서 누구나 윤 대통령의 통절한 성찰과 반성의 메시지를 기대했다.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12분간 모두발언을 통해 내놓은 메시지는 실망스러웠다.

국무위원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과의 뜻은 별로 읽히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보며 국익을 위한 걸을 걸어왔지만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서 각종 정책에 대해 “부족했다”,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 “미흡했다”고 했을 뿐이다. “아무리 국정 방향이 옳고 좋은 정책을 수없이 추진한다고 해도 국민이 실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했다. “방향은 옳았는데 실적이 좋지 않았다는 변명만 늘어놨다”는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평가가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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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국장에서 공항 이용객들이 TV로 중계되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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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발언이 끝나고 4시간이 지나 대통령실 참모의 백그라운드 브리핑이 있고서야 뜻이 분명해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과 참모회의를 통해서 ‘국민들께 죄송하다’ 이렇게 말을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부터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어린 시절 잘못해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을 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손을 모아 빌면서 용서를 구할 수도 있지만 매를 맞으면서 내가 뭘 잘못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성한다면 그 사랑의 회초리의 의미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고도 전했다.

윤 대통령은 각종 연설문 작성을 주도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검찰총장 취임사와 퇴임사, 대선후보 수락 연설문 등도 직접 쓴 것으로 전해졌다. 연설문에 ‘자유’, ‘미래’, ‘연대’와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도 그의 생각이 그대로 담긴 결과다.

2019년 7월 검찰총장 취임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을 지키는 데 법집행 역량을 더 집중시켜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어 의아해 한 이들이 많았다. 당시에도 대검찰청 대변인실이 추가 설명자료를 내 “신임 총장은 시카고학파인 밀턴 프리드먼과 오스트리아학파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일이 있었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고집불통 이미지만 더욱 두껍게 칠할 뿐이다.

다음달 10일 취임 2주년을 맞는 윤 대통령에게 남은 3년여은 험난한 과정이 될 게 분명하다. 175석의 민주당은 22대 국회의장과 법제사법위원장, 운영위원장까지 확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총선에 드러난 민심을 반영하는 길이라는 궤변을 편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16일 “법사위와 운영위는 이번에 꼭 민주당이 갖는 게 맞다”고 말했다. 원내대표를 지낸 김태년 의원은 “이론상으로 보면 168석이 넘어가는 순간 모든 상임위는 그냥 한 당이 다 가져도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에게 “총선 민심에 그렇게 상임위 다 가져오라고 쓰여 있었어요(1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라고 한마디 하는 정치원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의 말이 들릴 리 없다.

목적은 분명하다. 개혁입법이라는 명분으로 각종 법안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21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힘에 넘김으로써 개혁 입법이 좌절됐다. 다시는 그런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법사위원장은 고수해야 된다”는 최민희 당선자의 말 그대로다. 민주당이 12석의 조국혁신당과 경쟁에 나서면 더욱 강경노선을 고집할 공산이 크다.

윤 대통령이 아무리 진심으로 여야 협치를 바라더라도 협치가 쉽지 않은 정치 지형이다. 윤 대통령이 이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국무총리 후보로 ‘박영선 카드’를 검토하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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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전 장관.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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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전 장관은 국무총리 후보로 손색이 없다. 4선 국회의원에 문재인정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내 의정 및 행정 경험을 두루 쌓았다. 언론인 출신이라서 정책과 현안에 대한 파악이 빠르고 이해가 높다. 한반도 문제와 미·중 패권경쟁 등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통찰력도 남다르다.

무엇보다 최근 반도체를 둘러싼 각국의 패권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반도체 총리’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격이다. 올해 초에는 중기부 고위공직자 출신 2명과 함께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과 우리의 생존전략 등을 모색한 책 ‘반도체 주권국가’를 펴내기도 했다.

윤 대통령과 박 전 장관 사이도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 데 박 전 장관의 역할이 있었다. 박 전 장관이 2013년 10월21일 윤 당시 여주지청장을 서울고검 국정감사장으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없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에서 배제되고 여주지청장으로 밀려나 있던 윤 대통령을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이던 박 전 장관이 별도로 연락해서 나오게끔 설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박 전 장관 카드를 꺼내는 방식이 실망스럽다. 지금 필요한 건 야당의 협조다. 국회 인준을 받아야 하는 국무총리 인선을 위해선 절대적이다. 뜬금없이 ‘박영선 카드’를 꺼내면 ‘친명(친이재명)’ , ‘친문(친문재인)’ 간극을 파고든 정치공학적 인사라는 오해를 살 뿐이다.

차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중요하다. 윤 대통령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직언하고 여야를 오가면서 협상해 낼 인물이 필요하다.

비서실장을 통해 국무총리 후보들 제시하고 야당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려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부터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만나야 한다. 총선 직후 축하 전화라도 먼저 걸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박희준 논설위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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