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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일주일 동안 온 마을 불탔는데…세상은 모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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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76년…93세 오태경 ‘4·3 문화해설사’가 말하는 그날의 진실

경향신문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오태경 할아버지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사무소 앞 마당에 설치된 안내판 앞에서 4·3길 코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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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응원경찰 ‘탄압’
표선 백사장서 학살 일삼아

가시마을만 421명 사망 집계
신고 못한 희생자 더 있을 것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를

제주 남동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봄의 정취 가득한 이 아름다운 마을은 76년 전 ‘제주 4·3사건’으로 주민 421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집은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됐다. 가시마을은 제주시 노형동과 북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인명피해가 컸다. 다음달이면 4·3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76년이 된다.

가시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태경 할아버지(93)는 18세 때 4·3을 마주했다. 참혹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그는 “4·3에 대해 들어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이 곳에선 1948년 5·10 선거 당시 마을 투표소를 습격한 무장대에게 이장과 학교 교장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는 무장대가 투표소를 습격하는 사건은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오 할아버지는 “무장대 습격 이후부터 마을에 서북청년단이 살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육지에서 들어온 응원경찰도 가끔씩 와서 난리쳤다. 매일같이 얻어맞고 총질당하고…. 마을 청년들이 고야동산에서 보초를 서 ‘서청이 온다’ 하면 도망쳐 숨었다가 밤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11월15일 진압군이 마을에 와서 한 집 건너 한 집 식으로 불을 붙이더라. 그날 하루에만 30여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일주일을 태우니 온 마을이 탔다”고 말했다. 가시마을 주민들은 소개령에 따라 표선국민학교와 토산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집단수용되거나 인근 마을 또는 산으로 흩어졌다. 오 할아버지도 부모님과 함께 토산 창고에 수용됐다.

오 할아버지는 “12월 어느, 참 달 좋은 밤이었는데 군인들이 토산 창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사로 모두 모이라고 했다. 토산리 사람들도 향사로 모였다. 군인들이 가시 사람, 토산 사람 나눠 서라고 한 후 토산 청년 100여명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 데려가더라. 그 앞에서 달달 떨면서 봤다. 가시리 사람 3명도 끼어 있었는데 모두 표선 모래판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이때 끌려간 주민들은 12월18~19일 표선 백사장(한모살)에서 총살당했다. 이후에도 표선 백사장에서는 도피자 가족, 수용 중이던 소개민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4·3사건 추가 진상조사 보고서는 4·3 당시 표선 백사장에서 가시리, 토산리, 세화리, 성읍리, 수망리 주민 등 234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월22일에는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던 가시리 주민 76명이 표선리 버들못에서 집단총살당했다. 경찰이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끌고 가 사살했다.

그는 “12월 그믐쯤에는 창고에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길 건너 밭에 대여섯 사람을 세워놓고 총을 겨눈 채 쏘면 박수 치라고 하더라. 엄마 품에서 아이가 기어나오니 아이에게도 총을 쐈다. 참 기가 막힌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토산 창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갔다. 그의 형은 산으로 올라간 후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형수는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산에서 내려왔으나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서 1년형을 받고 두 살배기 아이와 함께 전주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왔다.

그는 “마을 희생자는 신고 숫자로 421명이지만 가족 모두가 죽어 신고하지 못한 이들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을 것”이라면서 “마을은 1949년 5월 재건됐다”고 했다.

오 할아버지는 2017년 가시마을 4·3길이 개통하면서부터 현재까지 8년째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5월 4·3희생자유족회와 함께 미국을 찾아 4·3 경험을 증언했다. 내용의 참담함에 통역사와 참석자 모두 오열했다.

그는 4·3유족회, 천주교 제주교구, 세계섬학회, 제주주민자치연대와 함께 미국 백악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미 군정기에 발생한 4·3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생각난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개돼지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여겼다. 제주 사람은 총에 맞아 죽어도, 죽도록 맞아도, 어디 가서 굶어 죽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내 갑장 6명도 인천형무소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그런 세상이 다시는 오면 안 된다는 생각에 4·3을 알리고 있다. 제주의 세가 약해서 그런가, 그 어떤 역사보다 큰 피해와 악행을 당했는데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 억울한 4·3이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미라 기자 mr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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