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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뼈 사이에 탄피, 손목엔 전화선…73년 만에 찾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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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 전쟁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유해가 73년 만에 발굴됐는데, 당시의 참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공성근 기자입니다.

<기자>

1950년 10월, 김장호 씨의 아버지는 마을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습니다.

[김장호/아산 부역혐의 희생자 유가족 : 키가 작으니까 (나무 위에) 올라서면 저기 산모퉁이 거기까지 가시는 게 보여요. 여기서 본 게 아버지 뒷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마을 회의가 아닌 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피난 갔다 돌아온 아버지가 오히려 인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갖은 고문을 당한 겁니다.

[김장호/아산 부역혐의 희생자 유가족 : (면회 다녀온 삼촌께서) 형님은 지금 돌려보내도 사시지 못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그날 경찰서 뒷산에서는 총성이 들렸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집단 학살이 이뤄졌던 야산, 성인 남성 백골 1구가 땅에 기대앉아있습니다.

군용 전화선은 73년이 지난 지금도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녹슨 탄피들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박선주/충북대 명예교수 : 전체적으로 탄피가 굉장히 많이 나오죠. 원거리에서 쏜 게 아니라, 가까이서 난사하듯이 쐈던 거죠.]

김 씨의 아버지처럼 부역혐의를 받은 지역 주민은 경찰과 치안대 등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습니다.

유해가 발견된 곳은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만든 방공호로 총길이가 2km에 달합니다.

이번에 이곳에서만 모두 40구가 넘는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당시 근무했던 경찰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매일 밤 트럭으로 40~50명을 방공호로 실어 가 처형했다"고 밝혔습니다.

전체 민간인 피해자는 8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DNA 대조를 통해 가족에 인계된 유해는 지금까지 1구에 불과합니다.

[김광욱/아산 부역혐의 희생자 유가족 : 국가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마무리를 지어줘야 합니다. 저희는 7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영상취재 : 신동환, 영상편집 : 김병직, CG : 제갈찬)
사공성근 기자(402@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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