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K옥션(대표 이상규)은 조선 후기 탕평정치를 펼쳤던 정조(1752~1800)가 붕어하기 4년 전부터 붕어하던 해까지 4년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 297통을 오는 27일 오후 5시 강남구 신사동 K옥션 경매장에서 열리는 ‘봄 경매’를 통해 판매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최대 정적에게 은밀하게 보냈던 정조의 편지 297통과 피봉(편지봉투)을 6권으로 묶은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의 경매 추정가는 12억~20억원이 매겨졌다. 이는 보물급의 진귀한 문화재로도, 또 역사적 학술적 자료로써 그 가치가 지대하기 때문이다.
정조와 심환지 간의 ‘은밀한 핫 라인’을 보여주는 이 서찰은 지난 2009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대학원에 의해 세상에 최초로 공개되며 큰 파란을 일으켰던 편지다.
무엇보다 정조가 수백차례에 걸쳐 편지를 쓴 인물이 자신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심환지라는 사실은 놀라운 반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심환지는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오랫동안 지목됐던 인물이다. 또 노론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세게 반대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 반대세력을 과감히 끌어안으며, 놀라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긴박감 넘치는 비밀 어찰 속 상황은 정치적 수가 대단히 높았던 군왕의 감춰진 면모들을 낱낱히 드러낸다. 때로는 강하게 밀어붙이고, 때로는 부드럽게 회유하며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 국정을 자기 뜻대로 펼쳤던 정조의 막후정치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도 정조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으며,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있는 상소문 중에는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줬던 문구대로였던 것이 그 방증이다. 정조는 하고 싶은 일을 신하의 입을 통하는 형식으로 처리했던, 노련한 막후통치자였던 셈이다. 과연 ‘정치 9단’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심환지 외에도 남인의 영수 채제공 등에게도 서찰을 보냈다. 이들 편지는 심환지에게 보낸 사찰 보다 먼저 세상에 공개됐었다. 때문에 정조가 노론 시파나 소론 등 다른 파벌에게도 어찰을 보냈을 공산이 크다. 얼키고 설킨 당파에 노련하게 대응했던 정조의 정치력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조선후기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이지만 급한 성정으로 인해 ‘호로자식’,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꼴 갖추지 못한 놈’같은 격한 표현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심환지와 국정을 논의했던 대목은 군왕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조는 이따금 ‘쥬먹구구’, ‘껄껄(呵呵)’같은 한글 표현도 써가며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햇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선 볼 수 없었던 인간 이산의 감춰진 모습이라 하겠다. 심환지는 정조로부터 끝없이 ‘비밀편지를 폐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봉과 함께 깊이 간직했다. 이는 심환지가 일종의 정치적 보험으로 어찰을 보관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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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야가 갑갑하리만치 대립만 거듭하는 이 ‘불통의 시대’에, 정조의 비밀 서찰은 반대파, 심지어 독살설의 배후인물로까지 의심받고 있는 정적을 국정의 동반자로 포용하고, 리드해가며 정국을 이끌어간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늘의 달은 하나이지만 물에 비친 그림자는 여러 개이기 마련’이라며 신하들의 성향 또는 행동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부지런히 편지를 써가면서 소통과 조정을 이루고자 했던 정조의 유연한 대응은 이 시대에도 주효할 듯하다.
정조 어찰첩은 16~26일 서울 K옥션 전시장에서 직접 살펴볼 수 있다. K옥션은 이번 봄 경매에서 정조 어찰첩 외에,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Paintings: Tomato and Abstraction’(추정가 35억~50억원)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 134점(총추정가 약 94억원)을 경매에 올린다.
경매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과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천경자, 이대원, 이우환, 김종학, 오귀스트 로댕, 요시토모 나라, 랄프 플렉,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조각과 회화가 출품됐다. (02)3479-8824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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