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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한 공장 헐리면 연쇄적 고통…청계천 공구거리는 산업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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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6일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조무호 태광정밀 사장, 정연정 신한정밀 사장(왼쪽부터)이 서울 중구 을지로·청계천 일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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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보시죠.” 말 없이 금속 부품을 다듬던 그가 일어섰다. 거센 바람이 나오는 호스로 자신의 몸에 붙은 쇳가루와 먼지를 털어냈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중구 입정동의 태광정밀 조무호 사장(60)을 따라 거리로 나섰다. 그는 이날 입정동(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을 중심으로 한 을지로·청계천 ‘산업 생태계’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곳 소상공인들은 서로를 ‘열 손가락’으로 여긴다. 강문원 두루통상 사장(60)은 “청계천은 열 손가락이다. 엄지는 엄지대로, 중지는 중지대로 자기 일만 할 줄 안다. 손가락들을 합치면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손가락이라도 사라지면 생태계가 무너진다”고 했다.

을지로·청계천 일대 재개발 진행

상인들 반발에 서울시 정책 수정

인근 공공산업거점에 수용 방침


을지로·청계천 일대에는 수십년간 작은 ‘공장’들이 모여 거대한 공장지대가 형성됐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탱크,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한국 기술 발전의 근간이 된 곳이다. 중소기업·연구자·학생들은 이 공구거리의 힘을 빌려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든다.

2017년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이 지역에 3만5000여 업체가 모여 있다.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 통과 이후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돼왔다. 상인들 반발이 커지자 서울시는 지난 4일 ‘보전·재생’을 중심으로 한 새 계획안을 내놓았다. 기존 재개발 대책을 큰 틀에서 유지하되 인근에 공공산업거점 8곳을 신설해 상권을 유지하겠다는 게 골자다. 그럼에도 소상공인들의 불안과 체념, 두려움은 여전하다. 많은 이들이 을지로·청계천에서 쫓겨나고 있다. 일부는 걱정을 잊으려고 일에 몰두한다. 입정동 거리에는 금속을 깎고 다듬는 기계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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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일 대우목형 사장이 지난 13일 만든 목형.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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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정밀에서 1~2분 정도 미로처럼 얽힌 거리를 걷다 대우목형에 들어갔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제품 모양을 본뜬 나무 틀인 목형이 필요하다. “목형을 만드는 게 첫 순서예요. 주물 집에서 목형에 모래를 덮습니다. 그 뒤 목형을 빼고 모래에 쇳물을 부어 제품을 형상화하죠.” 조 사장이 말했다. 대우목형은 을지로·청계천에서 마지막 남은 목형 업체다. 장종일 사장(62)이 끌로 목재를 다듬었다. “다른 목형 집은 1차 재개발로 헐리거나 나이가 들어서 그만뒀지.” 지난해 1차 재개발 당시 세운재정비촉진지구(세운) 3-1·4·5구역에서는 400여 업체가 쫓겨났다. 그 자리에서는 주상복합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새 계획안에서도 아파트 건설 계획은 유지됐다. 대우목형 가게 벽에 걸린 시계에는 ‘상인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청와대 시계가 걸려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이름이 적혔는데 지워버렸어. 오는 사람마다 사기꾼 같다고 해서. 시장이 바뀌어도 우리 얘기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요.”

임시 영업장은 업체수보다 적고

“좁아서 기계 다 들어가지도 못해”

가든파이브 전례처럼 비용 문제도

한국 기술 발전의 근간이 된 곳

보존 위한 실질적 대책 마련해야


장 사장은 상인들을 위한 재개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고 했다. “(공공산업거점을 만들기 전에) 임시로 이주시켜 주겠다는 곳은 좁아서 전부 다 가지 못해. 프레스 기계는 들어가지도 못하지. 진동이 크잖아. 우리가 다른 데로 나가면 받아주질 않아. 먼지에, 소리에, 냄새 나니까 안 받아줘.” 과거 이명박·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가 상인들을 송파구 가든파이브로 이주시키려다 실패한 사례도 들었다. “건물만 지어놓으면 뭐해. 들어갈 수 있게 해야지. 처음 들었을 때는 분양가가 14평에 7000만~8000만원이었어. 막상 들어가려니 1억9000만원을 달라고 했지.” 18세부터 청계천에 자리 잡은 장 사장도 언젠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목형업체가 한 곳도 남지 않는다.

장 사장이 이날 만든 빵틀 목형은 도보 1~2분 거리에 있는 진흥주물로 옮겨졌다. 주물작업을 위해서다. 금속을 녹여 주형 속에 넣고 응고시켜 원하는 모양의 제품으로 만드는 일이다. 진흥주물 사장 ㄱ씨는 청계천에서 40년 동안 주물 장인 일을 하고 있다. ㄱ씨는 재개발을 두고 바라는 점이 없냐고 묻자 “다 끝났는데, 바라긴 뭘…”이라며 입을 닫았다. ㄱ씨는 계속된 합의 종용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한두 달 내로 가게를 비우기로 했다. 이곳에도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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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주물 소속 ㄴ씨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청계천 일대 자신의 가게에서 주물 작업을 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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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조 사장이 거들었다. “ㄱ사장님은 1차 재개발 때 쫓겨나서 여기로 온 거예요. 또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1차 재개발 때 강제로 내보내다시피 했어요. 통장도 가압류하고 매일 집주인, 건설회사가 찾아오고, 보상도 제대로 안 해줬죠.” 시행사(더센터시티제이차)가 개인당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가게 안에서 ㄱ씨 동생 ㄴ씨가 주물작업을 했다. ㄴ씨는 긴 국자처럼 생긴 도구에 달궈진 쇳물을 담아 틀에 부었다. 은색 쇳물은 부글부글 끓다가 굳었다. 이내 빵틀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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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은 주물작업 이후 조 사장의 가공을 거쳐 칠작업으로 마무리된다. 진흥주물은 바로 옆 도장업체인 거액칼라테크와 협업한다. 문윤식 사장(44)이 마스크를 쓴 채 제품에 스프레이 칠을 했다. 9년 경력의 그는 60년간 일한 장인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 역시 보상을 받고 재개발 대책에 합의했다. 27일 종로4가로 옮긴다. “지난해 1차 재개발 때 너무 허무하게 허물어졌어요. 2차 재개발에선 ‘버텨보자’ 하는데 매일 오락가락해요. 사장님들이 다들 연세가 많은 데다 정보력이 없으니 유언비어에 흔들리죠. 나이 든 분들은 ‘합의를 안 하면 보상금을 아예 못 받는다’는 말에 민감해요. 법도,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의 업체가 위치한 세운 3-6·7구역에선 합의를 안 한 업체가 20여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 있는 게 편하죠. 다 모여 있잖아요. 깨끗하게 살려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고, (관광객들이) 구경하는 거리도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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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식 거액칼라테크 사장이 지난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청계천 일대 자신의 가게에서 칠 작업을 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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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조 사장 가게에서는 손님이 기다렸다. 차모씨(60)가 종이에 직접 그린 도면을 들고 서 있었다. 정보기술(IT) 관련 회사에서 퇴직한 차씨는 혼자 친환경 발전기를 개발 중이다. “여기 자주 와요. 계속 실험하기 위해서죠.” 차씨와 조 사장이 상의했다. “좀 더 깎아야겠는데.” 조 사장이 안경을 끼고 부품을 깎았다. 차씨는 서울시 재개발 대책에 아쉬움을 표했다. “안타까워요. 이런 곳이 없으면 우리처럼 아이디어를 실현해보려는 사람은 힘들어요. 이곳이 참 고마워요.”

많은 상인들은 서울시가 내놓은 재개발 정책에 만족하지 않는다. 기계·금속 제조업체들이 밀집된 세운 3·5구역의 약 400개 업체를 철거하고 주상복합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은 여전하다.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면 그간 축적된 생산·유통망이 끊어질 위험이 크다. 강 사장이 말했다. “우리는 일터 골격은 두고 깨끗하게 하는 걸 원하는 거지 때려부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건 보존이 아니라 파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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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호 태광정밀 사장이 지난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청계천 일대 자신의 가게에서 가공 작업을 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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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마련된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임시로 이주하게 하는 정책 또한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 따르면 재개발이 예정된 세운 3-2·6·7구역 업체는 총 172개지만 서울시와 시행사가 제시한 임시 영업장 수는 111개에 불과하다. 정연정 신한정밀 사장(52)은 “이주하고 자리 잡는 데 몇개월이 걸린다. 비용도 그렇지만 두 번 이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울시가 상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상인들이 지난해 10월부터 협의체 구성을 요청했으나 서울시가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행사의 압박도 여전하다. 정 사장 가게 앞에는 이날도 법원에서 온 문서가 붙어 있었다. 아파트를 지어야 하니 빨리 나가라는 내용이다. “사람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스트레스를 받게 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만 했으니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아나요.”

을지로·청계천 일대 산업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상인들은 입을 모았다. 중소기업 연구실·기술공업고 실습실 등과 같이 개발 인력과 제조·기술 인력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 계획안으로 정비구역에서 해제된 지역에 대해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기존 업체들의 리모델링 대책도 필수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서울시가 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협의기구를 만들어 상인들과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장현욱 활동가(37)는 “실효성 있는 대책은 이 지역을 만들어온 상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몇차례 성사된 서울시 면담에선 상인들이 서울시와 시행사의 입장을 듣기만 했다”고 했다. 서울시 측은 “수차례 설문조사와 논의를 했다. 앞으로도 구청 등과 함께 협의체를 꾸려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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