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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중국판이었던 세계 바둑… 19세 청년이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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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홍렬 바둑 전문기자의 19路]

세계랭킹 1위, LG배 우승 신진서

2012년 영재(英才) 입단대회를 통과하고 프로가 돼 처음 마이크 앞에 섰던 초등학생을 기억한다. 1m60㎝의 가냘팠던 그 어린이는 1m80㎝이 넘는 헌칠한 장부가 됐고, 앳되던 목소리는 중저음 베이스로 바뀌었다. 3월 17일 만 20세 생일을 맞는 신진서(申眞言胥)다.

지난 8년간 그가 바둑 승부사로 보여준 도약은 육체적 성장을 압도한다. 크고 작은 우승컵만 12개를 품에 안았다. 그중엔 20세 이하 세계대회인 제4회 글로비스배(2017년), 31회 TV아시아대회(2019년) 등 국제 기전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지난 12일 제24회 LG배 결승서 박정환(27)을 누르고 마침내 세계 메이저봉(峰)에도 깃발을 꽂았다. 다승, 승률, 연승 등 국내 기록 부문과 세계랭킹 사이트인 고레이팅(go rating)에 이르기까지 1위 자리는 온통 신진서가 독점하는 흐름이다.

출범 사반세기를 맞는 LG배 조선일보기왕전은 세계 바둑의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초일류 스타들의 각축 속에 바둑 지도가 지각변동을 일으킬 때마다 결정적 무대를 제공해왔다. 초창기 때는 지구촌 일인자 이창호의 텃밭이었고, 2003년 7회 대회는 이창호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이세돌의 대관식장이었다. 그 이세돌이 쇠락의 길로 접어든 출발점은 2009년 13회 LG배 구리(古力)와의 백담사 혈투였다. 박정환을 누르고 새 시대를 열어젖힌 신진서 9단을 지난 21일 한국기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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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서는 매일 한국기원에 나와 국내외 주요 기보를 놓아보며 공부한다. 그는 “입단 후 1년쯤 뒤 출범한 국대(국가대표) 훈련이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처음엔 어린 유망주들만 참가하는 리그였으나 최철한·김지석·박정환 등 초일류들이 가세했고, 그들로부터 복기(復棋)를 받으면서 한 단계 더 도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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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감회가 남다른 우승이었죠?

"첫 메이저 타이틀이어서 많이 기뻤습니다. 준결승서 커제, 결승서 박정환 사범님 등 최강자들을 꺾은 데다 그 앞의 상대들도 모두 뛰어난 기사들이어서 값진 우승이라고 자부해요. LG배는 제가 프로 입단 전부터 언젠가 꼭 우승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꿈을 키워온 무대여서 더 보람을 느낍니다."

―만 20세 이전 세계 메이저를 정복한 기사가 그간 총 9명 나왔죠. 2018년 제22회 LG배 때의 셰얼하오에 이어 2년만으로, 신 9단이 열 번째 자리를 채운 것도 의미가 큽니다.

"세계 타이틀 획득이 빠른 편이 아니라 오히려 아쉽습니다. 원래 목표보다 많이 늦었어요. 2017년쯤 첫 세계 제패를 이룰 꿈에 부풀었었는데 모두 실패했죠. 그 후에도 두 번의 세계대회 결승서 모두 패하고…. 당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자만심이었습니다. 이번 우승으로 모든 아쉬움을 털어냈습니다."

―LG배 결승 과정을 복기해 보죠. 2012년 입단 인터뷰 때 "앞으로 일인자 박정환 9단과 정상을 다투는 게 목표"라며 "그의 흔들리지 않는 기풍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박 9단을 흔들어 우승했어요. 비결이 뭘까요?

"비결 같은 건 없고 상대가 초읽기에 몰려 스스로 무너진 거죠. 1국이 분수령이었어요. 막판 패배 직전까지 몰려 다음 판을 위해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박정환 사범님이 연속 실착을 범해 기적적으로 제가 이겼죠. 종료 직후 박 사범님이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오래 못 잊을 것 같습니다. 나였다면 못 견뎌 돌 쓸어 담고 나왔을 것 같은데, 박 사범님은 표정 하나 안 바꾼 채 복기까지 마치고 일어섰어요."

―이번 결승 이전엔 박정환 9단에게 4승 16패에 10연패(비공식전 1패 포함)로 몰렸었죠. 그야말로 천적이었던 셈인데, 어떻게 대비했나요?

"LG배를 앞두고 박 9단이 인터넷 대국을 하는지 매일 사이트에 들어가 지켜봤어요. 결과 확인 후 대국 기보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박 사범님은 언제 만나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지만, 이제 연패는 안 당해야죠.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밀려 많이 힘들었습니다. 실력으로 앞선 적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부담감까지 가중됐었죠."

신진서의 어린 시절 성장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 소재로 손색이 없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인터넷 바둑 7단인 아버지(신상용·58)와 1급 실력의 어머니(송윤옥·51)는 부산 사상구 주례동에서 바둑학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만 4세 때 처음 바둑돌을 잡은 진서는 불과 1년 뒤 초등학교 저학년부 대회를 제패했고, 다시 부산시 영남초등학생 대회서 3~4세 위 형들을 꺾고 우승했다. "부산에 신동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쫙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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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배운 뒤 혼자 놀던 네 살 무렵의 신진서. 엄마가 가르치는 ‘1교실’ 기초 교육을 한 달 만에 끝내고 아버지의 ‘2교실’ 반으로 승격하면서 수직상승을 시작했다.


입문 1년 반 만에 아버지로부터 백돌을 빼앗았다. 4학년이 되면서 전국 어린이 대회 4관왕에 오른 뒤 2011년 초엔 일반인 입단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6승 4패로 프로행엔 실패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해 9월 한국기원 연구생에 들어간다. 5학년 때였다.

주위에 적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넷 대국실이 그의 활동 공간이 됐다. 어린 시절엔 하루 10판은 기본이었다. 만 9세 때 시작해 지금까지 신진서가 인터넷에서 소화한 판 수는 2만 판이 넉넉하게 넘는다. 여러 일정으로 바쁜 요즘에도 그는 인터넷에 매일 들어가 평균 2판씩은 꼭 소화한다.

―그러던 중 2012년 2월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지요?

“부모님이 20년 넘게 살아온 부산 생활을 정리하신 것은 오로지 저를 세계 일인자로 만들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냥 입단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세계 최고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상경 후 충암도장에 들어가서야 세상 넓은 줄 알았죠.”

―하지만 불과 5개월 만인 그해 7월 열린 제1회 영재 입단대회를 1위로 통과해 12세 4개월(역대 5위)의 어린 나이에 프로가 됐어요.

“한국기원이 첫 영재 입단대회 출전 자격을 98년생 이후로 끊어 변상일 김명훈 형 같은 97년생 강자들이 못 나오는 바람에 수월하게 입단했죠. 그렇지만 당시 연구생 리그서 32명 중 2위까지 오르는 등 성적이 좋아 영재 대회가 안 생겼더라도 곧 입단했을 것 같아요.”

―입단 직전 충암도장서 보낸 5개월을 빼면 사실상 독학(獨學)으로 세계 정상 정복까지 이룬 셈인데, 바둑계에선 굉장히 드문 사례라고들 얘기합니다.

“인터넷 덕이 컸지요. 요즘과 달리 그때는 막강한 중국 강자들도 대국 신청을 거의 다 받아 주었거든요. 입단 1년 전 무렵부터 세 살 위 커제와 온라인으로 자주 맞붙었죠. 지금까지 대략 200판쯤 두었습니다. 커제는 이미 프로 기사였기 때문에 초기엔 제가 좀 뒤졌지만 그때도 일방적으로 몰리진 않았어요. 또 미위팅 판팅위 천야오예 당이페이 등 최고 스타로 발돋움 중이던 강자들과 원 없이 실전 스파링하며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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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서는 장기적 목표로 세계대회서 10회 이상 우승하는 것, 그리고 1995~2005년 사이 출생 기사들 중 최고의 기사로 기록되는 것을 꼽았다. 그간 80~90년대생들이 주도하던 세계바둑 최정상권 다툼은 신진서의 이번 LG배 우승을 신호탄 삼아 2000년대 출생 기사들의 손아귀로 빠르게 이동할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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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 지면 언제나 울음을 터뜨렸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때나 지금이나 패하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웃음). 인터넷 대국서 질 경우 이길 때까지 두어야 했고, 그러다가 밤을 새울 때가 많았죠. 그 무렵엔 패배 아픔을 하루면 극복했는데 요즘엔 며칠씩 가기도 해요.”

―지금까지 가장 아팠던 패배를 꼽는다면?

“첫 세계 메이저 타이틀이 걸린 천부배 결승 최종 3국(2018년 12월)이죠. 천야오예(陳耀燁·31)의 끈기에 말려 역전패한 뒤 숙소에 돌아와서도 분이 안 풀려 한숨도 못 잤어요. 그 후 바둑에 지는 날은 아예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깨 있는 상태로 날밤을 보냅니다.”

―AI 최고 수혜자란 말도 듣지요?

“제 바둑이 AI를 통해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즘에도 포석과 감각 배양에 크게 도움받고 있어요. 다만 AI가 ‘좋은 선생님’인 건 분명한데, AI가 제시한 수(手)를 무턱대고 따라가는 방식으론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 몫으로 소화하기 위해 의문이 드는 부분을 반복해 검토합니다.”

신진서란 ‘브랜드’가 가장 밝게 빛을 발하는 지점은 2000년이란 그의 출생연도다. 2000년은 바둑계 달력으론 신구(新舊)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인식된다. 나이가 어릴수록 성적을 내는 요즘 바둑계에서 2000년 이후 출생 유망주들은 ‘금값’으로 대접받는다. 신진서는 한·중·일 합해 30~40명에 이르는 2000년대 출생 기사들 중 단연 발군이다.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세계 유일의 새 천년 출생 기사이자, 한국 바둑 일인자 계보를 이어받은 약관(弱冠)의 새 주자에게 안팎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세계 정상권 판도를 어떻게 보나요?

“나와 박정환 사범님에게 5대5의 호각세로 맞설 수 있는 중국 기사는 적게 잡으면 중국 1·2위인 커제와 양딩신(楊鼎新·22) 2명 정도이고, 넓게 잡으면 5~6명쯤 됩니다. 저는 커제와 천야오예에게 각각 3승 7패, 양딩신에게는 2승 4패로 뒤져 있는데 빨리 빚을 갚고 싶어요. 제가 양딩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전투 바둑과 집 바둑, 속기와 장고 구분없이 모두 잘 소화해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출생 동갑내기들 중엔 누구를 가장 의식하나요?

“딩하오(丁浩)와 대국하다 보면 기(氣)가 느껴집니다. 셰커(謝科)는 천재형으로 과거 충암도장에 유학 와 함께 지낸 적이 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엄청 늘었어요. 그리고 2004년생인 왕싱하오(王星昊·중국 66위)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16세에 불과한데도 굉장히 안정적인 바둑을 둬요.”

―앞으로 메이저 타이틀을 몇 개 더 따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나요?

“일단 10회는 넘기고 싶습니다. 횟수도 횟수지만 지금 내 나이 위아래로 다섯 살, 그러니까 95년생~2005년생 그룹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기사로 기록되길 소망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커제와 만날 때 특히 힘을 내야 해요. 이미 일곱 번이나 메이저를 접수해 고작 한 번 우승한 저와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기 때문이죠.”

―한국 일인자 계보로 보통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을 꼽습니다. 이들 중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까요?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 세 분으로부터 각각 다른 형태로 많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기풍상으로는 치열하게 싸우는 이세돌 사범님 유형을 좋아하지만 제게 필요한 것은 이창호 사범님의 판단력과 정리 능력이었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마주하며 영향을 받은 선배는 박정환 9단이었습니다.”

―일부에선 신 9단이 종종 유리한 형세를 지키지 않고 계속 싸우다 역전당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안정적이지 못한 점이 신 9단의 약점이라고 말하는데 동의하나요?

“안정적이란 말은 유리한 바둑을 지켜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저는 수비 아닌 몸싸움을 통한 정리도 승리를 다지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확률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 경우엔 전투를 통한 마무리가 체질에도 맞고 승리 확률도 더 높습니다.”

―바둑의 길을 선택한 것에 만족하나요?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권한다면 어떤 말을 해줄지, 다른 일을 하는 또래 청년들이 부러울 때는 없는지 궁금해요.

“바둑은 오묘하고 환상적인, 아주 특별한 세계입니다. 팬들이 바둑에 빠지는 것은 수천 가지 변화와 만나면서 엄청난 희열이 찾아오기 때문이죠. 체계적 사고 형성을 돕고 인성 교육에도 효과적이라고 해요. 저는 어렸을 때 급한 성격을 바둑을 배우면서 고쳤어요. 제 또래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뭐 학교에 다니는 것도 괜찮았겠다’ 정도? 세상 뭘 해도 어려운 거고, 공부는 언제 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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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기도 광명시 라까사 호텔서 벌어진 제24회 LG배 결승 3번기 제2국. 이 대국서 신진서(오른쪽)가 박정환을 이겨 2대0의 전적으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의 꿈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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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배 우승 상금이 3억원이죠. 작년엔 7억원 조금 넘게 벌었더군요. 한 달 용돈은 얼마나 쓰나요?

“평소 20만원에서 30만원 사이였는데 지난해 이후 성적이 좀 향상되면서 지출도 월 40만~50만원으로 늘었어요. 우승 턱은 아직 내지 않았습니다. 상금은 부모님이 저축해 주십니다.”

―하루 일과 중 바둑과 무관한 시간 비율은 얼마쯤 되는지, 뭘 하고 보내는지 궁금해요. 혹시 꿈속에서도 바둑을 두나요?

“꿈에서도 자주 대국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수순(手順)까지 생생히 재현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냥 대략의 전개 상황만 기억합니다. 바둑 외 부분에 제공되는 시간 비율은 10% 정도? 유튜브 서핑을 하면서 음악 듣는 걸 좋아합니다. R&B, 랩 등 클래식 빼곤 다양하게 들어요.”

신진서의 한자(漢字) 표기는 申眞言胥다. 言胥(서)는 ‘슬기’를 뜻하며 眞과 어울리면 ‘참 슬기’가 된다. 부친 신상용씨가 지었다. 신진서를 10년간 따라다니던 ‘한국 바둑의 미래’란 수식어는 이제 사라질 것이다. 또래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무찌른다고 해서 붙여졌던 ‘저승사자’ 별명 역시 시효가 다했다. 하지만 83세 친할머니의 스무 살 손자에 대한 ‘우리 황태자’ 호칭은 멈출 기색이 없다.

이 가족은 부산을 떠나 한국기원 2~3분(도보) 거리의 현재 집에 정착하기까지 8년 사이에 네 번 이사했다. 집안 막내둥이 진서의 대성을 위해 철저히 그의 활동 반경에 맞춰 움직인 궤적이었다. 맹모삼천 아닌 ‘신모사천(申母四遷)’이라고 할까. 한국 바둑을 이끌어갈 대들보를 키워낸 또 하나의 동력은 가족의 힘이었다.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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