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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미국 말만 따르나” 이란서 밀려나는 한국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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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재 속 이란을 가다]



미 제재에 부품 못들여와 생산 중단


테헤란 곳곳서 매장 문닫아

빈자리는 중국 기업이 채워



​미국 제재 탓 이해하면서도


“역사 깊은 나라가…”싸늘한 눈빛

“이란 설득 외교 부족…고위급 외교로 상황 악화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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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낮 이란 테헤란의 발리아스르 거리. 전자제품 매장이 밀집한 거리 곳곳에 문을 닫은 점포들이 눈에 띈다. 얼마 전까지 삼성과 엘지(LG)의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팔던 곳들이다. 이들 제품을 더는 구할 수 없게 된 매장들이 하나둘씩 셔터를 내린 것이다. 몇몇 문을 연 곳들은 재고로 버티는 형편이라고 한다. 30년 동안 삼성 제품을 팔고 있다는 매장 매니저 알리레자는 “재고가 조금 있어 문을 열고 있다. 하지만 3~4개월이면 이마저도 동난다”고 말했다.

8천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중동 최대의 시장 이란에서 한국 기업들이 쫓기듯 물러나고 있다. 이란과의 핵 합의를 깬 미국이 제재를 강화하면서 애꿎은 한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전자제품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삼성과 엘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란에서 제품을 조립 생산했는데, 미국이 지난해 9월 이란 관련 수출입과 금융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핵심 부품을 들여올 수 없게 됐다. 결국 삼성은 지난해 말부터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삼성과 엘지의 전자제품은 지난 10여년 동안 이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알리레자는 “수십년 전에는 유럽 제품이 인기였고, 십몇년 전까지는 소니가 최고였다. 이후부터는 한국 상표가 단연 1위였다”며 “한국 전자제품이 이란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란의 판매상들과 노동자들의 힘도 컸다”고 말했다. 이란인들과 함께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순식간에 무너진 셈이다.

한국 기업들이 떠난 자리에는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이 치고 들어오고 있다. 미국의 제재에 맞서 이란이 ‘저항경제’를 강조하자 삼성과 엘지의 이란 협력업체들은 독자 상표 개발로 돌아섰다. 삼성과 협력해온 이란 기업 ‘삼’(SAM)이 자체 상표로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알리레자의 매장 한쪽에도 ‘삼’ 상표를 단 냉장고가 전시돼 있었다. 부품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조달한다.

유럽과 일본 기업들도 이란에서 떠나고 있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비판은 유독 한국 기업에 매섭다. 모하마드 자파르 나나카르 정보통신기술부 법무국장은 18일 국영 <프레스 티브이>에 나와 “이란은 삼성 임직원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삼성 스마트폰을 이동통신망에서 아예 제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로 이란 리알화를 통한 결제가 불가능해지자, 삼성이 지난 10일 유료앱 거래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공지한 사실을 겨냥한 것이다. 지난 16일엔 아바스 무사비 외무부 대변인이 트위터에 삼성 매장 간판을 철거하는 사진과 함께 “미국의 괴롭힘에 따라 일부 기업이 이란을 떠났는데, 이들은 복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글을 한글과 이란어로 각각 올리기도 했다.

한국 기업들은 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높아질 때도 이란 시장을 지켰다. 이후 자동차, 전자제품, 화장품, 식품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부터 두차례에 걸쳐 이란에 대한 제재를 복원, 강화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특히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은 미국과의 거래도 중단되는 ‘세컨더리 보이콧’ 조항에 발목이 잡혔다. 미국과의 무역 비중이 큰 한국 기업들은 이란 시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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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미국의 요구로 호르무즈해협 파병을 결정하면서 사태는 더욱 나빠졌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호위연합체에는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란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하지만 무사비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한국의 파병 발표 직후 “한국이 페르시아만의 역사적인 명칭조차 알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과 정당성으로 군대를 보내는가”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며 한국에 우호적이던 이란인들의 눈길도 차가워졌다. 홍보 관련 기업을 운영하는 카말 타헤리는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철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텔레비전을 바꿔버렸다”며 “한국은 문화가 발달하고 역사가 깊은 나라인데 왜 미국의 얘기만 따르느냐”고 물었다.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이나 방위비 협상 등을 염두에 두고 미국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부터 테헤란의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는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란 문화에서는 결과보다 신뢰를 얻기 위한 과정이 중요하다. 일본의 꾸준한 고위급 외교와 비교해 한국은 미국에만 신경쓰고 이란에는 소홀하다는 인상을 줬다”며 “한국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커진 상태로, 한국이 더 이상 이란과의 관계가 악화하지 않도록 고위급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제재 강화로 지난해 5월 이란산 원유 수입이 전면 중단된 데 이어 9월부터는 무역 거래를 위해 유지해온 마지막 생명선인 ‘원화 결제 시스템’도 닫혔다. 지난해 1~11월 한국의 이란에 대한 수출은 2억6천만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88.6% 급감했다. 이란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원화 결제 계좌에 예치된 7조원 상당의 이란산 원유 및 초경질유 수입 대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제재 면제 승인을 받지 못해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유정현 이란 주재 대사는 “미국도 한국 기업들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란과 인도적 물자 거래를 위한 원화 결제 계좌의 제재 면제 등 한국의 입장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테헤란/글·사진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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