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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아침에 스코세이지 편지 받았다…봉 감독, 조금만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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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4관왕 봉준호의 소회

‘옥자’ 찍고 나서 심신 번아웃 상태

‘기생충’ 좋아 영혼 긁어모아 촬영

타란티노, 10분 넘게 조여정 칭찬

한국, 더 도전적 작품 끌어안아야

봉준호 동상 얘기는 죽은 뒤에나

중앙일보

봉준호 감독(오른쪽 넷째)과 영화 ‘기생충’의 주역들이 19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고 있다.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국제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각본상을 받았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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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냈어요.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쉬어라. 대신 조금만 쉬어라. 나도 그렇고 다들 차기작을 기다린다’고. 편지 보내주셔서 기뻤습니다.”

19일 오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이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석권(미국 현지시간 9일) 뒤 봉 감독이 가진 첫 공식 행사다.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과 제작자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공동 각본가인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도 참석했다.


봉 감독은 지난해 칸 영화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착용한 회색 머플러를 이날도 하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육체적, 정신적, 체력적으로 방전돼 (미국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착륙 방송을 들을 때까지 10시간 내내 잤다”고 운을 뗀 그는 “2017년 ‘옥자’ 끝났을 때 번아웃 판정을 받았는데 ‘기생충’을 찍고 싶어 없는 기세를 영혼까지 긁어모아 찍었고, 오스카(아카데미상 애칭) 캠페인 기간도 다 소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좀 쉬어볼까 했는데 스코세이지 감독님이 쉬지 말라고 하셔서”라며 활짝 웃었다.

봉 감독은 “여기 있는 배우들의 멋진 연기, 스태프가 장인정신으로 만들어낸 장면 하나하나, 거기에 들어간 저의 고민”을 언급하며 “영화사적 사건처럼 기억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영화 자체로서 (기생충이)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봉 감독의 영화 중 왜 유독 ‘기생충’에 전 세계가 열광했을까. “‘괴물’은 괴물이 한강변을 뛰어다니고 ‘설국열차’는 미래의 기차가 나오는 SF적 영화들이죠.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에서 있을 법한 얘기고, 배우들이 현실에 기반한 분위기, 톤을 잘 연기해 줘서 폭발력을 가진 게 아닐까요.”

아카데미 시상식을 “(미국) 로컬 영화제”라 한 것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처음 오스카 캠페인 하면서 무슨 도발씩이나 하겠어요. 영화제 성격에 대한 질문이 나오다가 쓱 나온 얘긴데, 미국 젊은 분들이 트위터에 많이 올렸나 봐요.”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것도, 천문학적 홍보비가 드는 오스카 캠페인에 뛰어든 것도 ‘기생충’이 처음이다. 지난해 8월부터 미국에서 오스카 캠페인을 펼친 봉 감독은 “낯설고 이상할 때도 있었는데, 어떤 작품이 뛰어났고 어떤 사람이 참여했는지 세밀하고 진지하게 점검해 보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겠더라”고 했다. 송강호는 “세계 영화인과 어떻게 호흡하고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나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며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 그만큼 위대한 순간들이었다”고 추억했다.

‘기생충’이 할리우드 배우들이 뽑는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출연진 전원에게 주는 영화 부문 앙상블상을 받았다. 외신에선 ‘기생충’이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도 올랐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주목 받은 이정은과 조여정에 대한 질문에 봉 감독은 “이정은 배우는 미국에서 ‘오리지널 하우스 키퍼’가 누구냐며 엄청난 화제였다. SAG 시상식 입장 때 톰 행크스가 강호 선배, 이선균씨, 특히 이정은 배우를 보고 아주 반가워하며 영화 질문을 길게 했다”고 소개했다.

“LA에서 길 가다가 만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10여 분을 조여정 캐릭터에 관해 얘기했어요. ‘부잣집 아내 역할을 하루 내내 생각했다. 연기와 캐릭터가 너무 인상적이었다’면서요. 앙상블상이 입증했듯 우리 전체 배우가 미국 배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아카데미 작품상 투표에서도 배우협회 회원들이 일등공신이 돼 줬죠.”

중앙일보

마틴 스코세이지


회견 중 미국 CNN 기자가 “한국 사회 불균형을 다룬 영화에 한국 관객이 지지한 이유”를 묻자, 봉 감독은 특유의 유머 코드로 “최성재(샤론 최·통역가)씨가 없는 상황이라 순간 당황했다”고 받았다. 그는 “영화엔 코미디적인 부분도 있지만 빈부격차가 드러나는 씁쓸하고 쓰라린 면이 있다. 그 부분을 단 1㎝라도 피하고픈 생각이 없었다”면서 “처음부터 엔딩까지 그런 부분을 정면돌파해야 하는, 그러려고 만든 영화다. 관객이 불편하고 싫어하실 수 있지만 달콤한 장식을 해가며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솔직하게 그리려고 한 게 대중적 측면에서 위험할 수 있어도, 그게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화산업의 불균형을 해소하자는 ‘포스트 봉준호법’이 거론되는 데 대해선 자신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를 끌어냈다. 흥행은 참패였지만, 제작자가 독특한 작품관을 높이 사면서 차기작 ‘살인의 추억’(2003)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요즘 젊은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기생충’과 글자 한 자 안 바꾼 시나리오를 가져왔을 때 영화가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한국 (영화)산업이 내가 데뷔한 때부터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더는 젊은 감독들이 이상한 시도나 모험을 하지 못하게 됐죠. 1980~90년대 붐을 이룬 홍콩영화가 어떻게 쇠퇴해 갔는지 선명하게 기억해요. 한국의 영화산업이 리스크를 두려워 말고 더 도전적인 영화를 껴안아야 합니다.” 봉 감독은 그러면서 “최근 독립영화 등 이곳저곳에서 많은 재능이 꽃피고 있기 때문에 산업과의 좋은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낙관했다.

‘기생충’은 미국판 HBO 드라마로도 만들어진다. 미드 ‘체르노빌’처럼 대여섯 에피소드의 밀도 높은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봉 감독은 ‘빅쇼트’의 감독 애덤 매케이와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그는 “초기 단계로, 캐스팅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아카데미 수상 후, 자신의 동상·생가 등에 관한 기사도 봤다며 “그런 얘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고 그냥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제가 딱히 할 말이…”라며 웃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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