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한국인 이야기’ 1권 펴낸 이어령 “남은 삶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남기고 싶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태명’ 등 12가지 고개로 얘기 풀어

‘알파고·이세돌’ 다룬 2권 곧 출간

“회고담 아니라 화두를 던졌으니, 누구든 한국인 이야기 메워줬으면”

경향신문

최근 <한국인 이야기-탄생>을 출간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1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책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야기꾼’이란 말이 제일 듣기 좋지. 그러니 ‘한국인 이야기’를 썼지. 학자 소리를 좋아했으면 논문을 썼겠지.”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이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87)이 또 책을 냈다. 1962년 경향신문 연재물을 모아 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당대 최고 글쟁이가 된 이후 6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전 장관은 쉬지 않고 글을 쓴다. 이 전 장관이 이번에 내놓은 책은 <한국인 이야기-탄생>, 부제는 ‘너 어디에서 왔니’다. 올해에만 3권이 더 나올 예정인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1권이다.

경향신문

이 전 장관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시작으로 100여권의 책을 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 문화와 시대를 통찰하는 저서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낸 책은 그 어느 책보다 쓰기 어려웠다. 2009년 중앙일보에 ‘한국인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책을 계획했지만 머리 수술, 암 수술 등으로 집필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18일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 전 장관은 “희수(喜壽·77세)에 시작했는데 미수(米壽·88세)에 나왔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지금도 건강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서 언론사들 개별 인터뷰 신청은 모두 사양하고, 한꺼번에 집 근처 단골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 책 설명을 할 때는 주변에 있는 그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다. 이 전 장관은 “컨디션은 괜찮으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이야기 한번 하면 이틀은 앓아누워야 한다”면서도 활짝 웃었다.

이 전 장관은 이번 책에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 떠도는 집단지성을 채록하고 재구성해 ‘한국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예 1권의 목차는 ‘꼬부랑 할머니’가 넘는 12가지 고개로 되어있다. ‘태명 고개’를 시작으로 ‘배내 고개’ ‘출산 고개’ ‘삼신 고개’ ‘기저귀 고개’ ‘어부바 고개’ ‘옹알이 고개’ ‘돌잡이 고개’ ‘세 살 고개’ ‘나들이 고개’ ‘호미 고개’ ‘이야기 고개’ 등으로 이어진다.

서양인들은 아이의 나이를 셀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엄마 배 안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 된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배 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부모는 아이의 ‘태명’을 지어서 배 안에 있는 아기와 ‘태담’을 한다.

한국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를 안고 자며,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함으로써 엄마 배 속 환경과 일치시킨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나라도 한국뿐인데, 이는 태중의 양수가 바닷물과 성분상 비슷해서라고 이 전 장관은 해석한다. 이 전 장관은 책에서 “엄마와 상호작용을 하게 했던 ‘포대기 육아법’은 엄마 등에 업힌 아이에게 엄마 자궁으로 돌아간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쌓이게 한다”며 “업은 엄마도 좋고 업힌 아기도 좋은 ‘어부바 문화’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반면, 서양 사회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은 무척 아쉽다”고 말한다.

이 전 장관이 아픈 몸을 다독여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문화적 유전자를 남겨주기 위해서다. 그는 “남아 있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해보니,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 쓰고 가는 것”이라며 “생물학적 유전자만 남기려 하지 말고 문화적 유전자도 남기면 덧없는 삶이지만 그 흔적은 남지 않겠냐”고 말했다. 또 “그저 회고담이 아니라 화두를 던져주고 싶다”며 “이게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앞으로 나올 <한국인 이야기> 2권의 부제는 ‘알파고와 함께 춤을’이다. 이 전 장관은 “(2016년 한국에서 열린)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엄청난 일인데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며 “지금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인간과 인공지능(AI)의 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그 뒤로 낼 3권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4권 ‘회색의 교실’ 초고도 이미 써놓은 상태다. 이 전 장관은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아이디어는 다 써놨으니까, 모든 사람이 진짜 한국인 이야기를 메워줬으면 좋겠다”며 “인생 자체가 한 토막의 이야기이고, 이야기를 해주고 가는 것이 호모 나랑스(Homo Narrans·이야기하는 인간)의 일평생이다”라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지금 많이 보는 기사

▶ 댓글 많은 기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