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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독재 상흔 닮은 광주·부에노스아이레스…예술·감상으로 ‘기억투쟁’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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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순 작가, 29일까지 서울서 ‘고스트 가이드’ 작품전

희생자·피해자들 애도 상징하는 ‘유령 형상’ 등 선보여

설치와 사진·VR 등으로 구성된 ‘친애하는 지구’ 등 눈길

경향신문

임흥순 작가가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두 도시의 기억투쟁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전 ‘고스트 가이드(GHOST GUIDE)’를 열고 있다. 위 사진은 설치작 ‘친애하는 지구-이불 유령과 돌 아카이브’(이불·빗자루·21조각 등), 아래 사진은 영상설치작 ‘고스트 가이드’(8채널 비디오·14채널 사운드·탁구공·나무세트 등). 더페이지 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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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제주 4·3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과 일본 군국주의 폭력의 상징인 ‘오키나와 전투’, 나치의 홀로코스트…. 기억투쟁은 역사적 진실이 왜곡될 때 일어난다.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기득권에 맞서 기록되지 않은 체험의 기억으로, 흔적이 남은 작은 잔해로 벌이는 힘겨운 싸움이다. 과거를 불러내 묻힌 진실을 밝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미래를 위한 운동이다.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인 임흥순 작가(51)가 더페이지 갤러리(서울 서울숲2길)에서 열고 있는 작품전 ‘GHOST GUIDE(고스트 가이드)’는 예술언어로 펼치는 기억투쟁의 하나로 읽힌다. 작가는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시공을 넘어 두 도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며 느끼게 한다. 두 도시는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공통된 기억이 있다. 독재권력의 폭력에 시민들이 희생당하고 그 상처와 아픔은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광주에선 198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선 1970년대 말 벌어진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다. 양국의 권력은 하나같이 진실의 은폐를 시도했고, 사람들의 기억투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전시장에는 설치와 아카이브·사진·가상현실(VR)로 구성된 작품 ‘친애하는 지구’, 영상설치 ‘고스트 가이드’, 2채널 비디오의 ‘좋은 빛 좋은 공기’가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을 처음 맞는 설치작은 원형 구조물 위에 이불을 빗자루에 씌운 유령 형상, 감옥·병원 등 두 도시의 역사적 현장에서 수집한 돌멩이·건물 잔해 등의 아카이브로 구성됐다. 두 도시 희생자·피해자들에 대한 애도를 상징하는 듯하다. 작가는 “두 도시 현장의 건물 잔해 등을 보면서 작고 사소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당시의 시간과 기억을 안내하는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카이브에는 두 도시뿐 아니라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 현장인 진도 용장성, 제주 4·3과 사북항쟁 유적지, 일본 오키나와, 비무장지대 최전방 감시초소(GP) 등에서 수집한 것들도 있다. 작가의 평소 관심사, 향후 작품의 단초나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빌린 철제 의자에 앉아 감상하는 VR 작품은 작가가 처음 시도한 매체로, 희생자 무덤 발굴 과정 등을 담아 역사 현장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영상설치작 ‘고스트 가이드’는 진실이 은폐돼 흔적으로만 남은 두 도시의 현장과 풍경·당시 자료 등을 탁구공 등 여러 오브제와 영상으로 표현한 작품,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되새기는 두 도시 청년들의 워크숍 과정을 담은 영상으로 구성됐다. 청년들의 워크숍은 임 작가가 기획했다.

‘빛고을’을 뜻하는 광주와 ‘좋은 공기’란 의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름에서 따온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희생자·실종자의 유가족 등을 인터뷰한 영상이다. 관람객 좌우에 서로 마주 보게 설치된 스크린에선 두 도시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 진실규명의 노력들이 육성으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두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 내용이 너무 흡사해 놀랄 정도다. 임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 은폐되고 지워지고 있는 것을 기억·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며 “두 도시 사람들이 겪은 시간, 그 시간의 의미들을 기억하고자 한 작업들”이라고 밝혔다.

전시장을 자세히 둘러보면 작품을 위한 작가의 철저한 조사·연구, 나아가 관람객의 공감과 동참을 이끌어내는 정교한 전시 구성이 돋보인다. 건물 잔해 아카이브나 VR 관람을 위한 철제 의자가 지닌 ‘고스트 가이드’로서의 상징성을 작가는 비닐봉지·탁구공 등의 오브제와 무너진 듯한 구조물 설치에도 오롯이 담아냈다. 사실 실치작의 원형 구조물은 두 도시의 광장을, 이불 유령은 광장 분수대를 차용했다. 분수대는 두 도시 시민들의 국가폭력 희생장이었고, 지금은 기억투쟁장이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분수대를 빙 돌며 시위를 벌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설치작은 관람객들이 한 바퀴 빙 돌며 감상하게 된다. 관람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두 도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기억투쟁에 동참하게 한 작가의 치밀한 구성이 아닐까.

임 작가는 그동안 제주 4·3사건 피해자나 여성 탈북자, 이주노동자, 자본의 노동착취 문제 등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희생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작품화해왔다. 구로공단 ‘여공’부터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까지 담은 ‘위로공단’은 한국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작품이다. 발언해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발언을, 우리 사회에 말해져야 함에도 말해지지 않는 말들을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다.

임 작가는 “예술의 역할은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게 하고, 말해진 것은 또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전시장에 놓인 목정원(공연예술 평론가)의 전시 글은 이번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전시는 이달 29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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