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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화상회의 때 밥솥이 외쳤다… 바이러스가 퍼뜨린 재택근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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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재택근무 확산 분수령 되나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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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2주 전 재택근무령이 떨어진 어느 제약 회사 직원 A씨. 며칠 전 집에서 화상회의를 하다가 진땀 뺐다. 후배에게 한창 업무 지시를 하는데 전기밥솥이 우렁차게 외쳤다. “쿠×가 맛있는 백미밥을 완성했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A씨는 "민망해 화면을 꺼버리고 싶었다. 재택근무를 해보니 예상 밖 복병이 많다"며 웃었다. 고양이, 강아지가 모니터 앞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불쑥 채팅 창에 얼굴을 내미는 동료 아기도 있었다.

신종 코로나 사태에 따른 직장 폐쇄, 자가 격리 등으로 '강제' 재택근무자가 부쩍 늘었다. 재택근무에 필요한 VPN(가상 사설망) 소프트웨어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IT 업체도 잇따르고 있다. 불청객이 불러온 고육지책이지만 이번 기회를 재택근무를 확산할 촉매로 삼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 영향이 물론 크다. 블룸버그는 지난 3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 세계 최대의 재택근무(Work-From-Home) 실험을 가져왔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비즈니스가 활발한 주변국으로 '재택 도미노'가 일어날 가능성도 짚었다. 한국에도 여파가 미칠 수 있다.

코로나, 재택근무 분수령 될까

예고 없이 재택근무 시험대에 오른 직장인이 많다. 2주 전 동남아시아에 다녀온 중소기업 대표 B씨는 싱가포르 출장자 중 확진자가 나타난 이후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기업용 메신저 '슬랙'과 화상회의 전문 서비스 '줌' 등을 이용해 집에서 일한다. B씨는 "직원들과 화상회의 중 채팅 창에 바로 자료를 띄워 함께 보고, 녹화도 할 수 있어 편하다. 특히 지방 미팅을 화상회의로 갈음하니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없어 좋다. 이전엔 '화상으로 하시죠'라는 말을 선뜻 못 꺼냈는데 이제 적극적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도 재택근무가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효율만 따지면 정해진 시간에 할 말만 하는 화상회의가 효과적이겠죠. 하지만 일에도 '우수리(일정한 수량을 채우고 남는 것) 타임'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무실에서 오가며 잠시 나누는 느슨한 대화로 얻는 아이디어도 중요하거든요."

의심 증상이 있는 동료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직장인 C씨는 "과거 메르스 사태 땐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독려하지 않았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있다는 신호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재택근무를 해본 동료는 익숙하게 업무 처리를 하는데 나처럼 안 했던 사람은 얼굴 안 보고 소통하려니 답답하다. 재택근무도 습관 같다"고 했다.

IT 선진국, 재택근무 후진국?

조선일보

통계청 '경제활동 인구 조사―근로 형태별 부가 조사'를 보면 2019년 '재택·원격 근무'를 경험한 근로자는 9만5000명. 2017년 5만9000명, 2018년 7만9000명으로 상승세지만 비율은 높지 않다. 유형별 유연 근무제(총경험자 221만5000명) 활용을 보면 시차 출퇴근제(33.7%), 탄력적 근무제(32.0%), 선택적 근무시간제(30.4%), 근로시간 단축 근무제(17.1%) 순이었다. '재택·원격 근무제' 경험자는 4.3%로 가장 적었다.

"IT 인프라는 세계 최고라는데 재택근무는 후진국 수준"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고용노동부 고용문화개선정책과 담당자는 "몇 년 사이 유연 근무제가 매우 늘었지만, 집에서 근무하면 근태 관리가 힘들고 보안이 어렵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해 재택근무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했다. '집=쉬는 곳'이란 고정관념도 뿌리 깊다.

외국계 기업 한국 지사장을 했던 D씨는 신뢰가 부족한 한국 기업 문화를 원인으로 봤다. "재택근무의 출발은 직원 신뢰다. 일반적으로 한국 회사는 직원을 믿고 내버려 두기보다 못 미더워 수시로 점검하니 재택 하기가 힘든 구조"라고 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부족도 지적했다. "미국에서 재택근무가 활발한 데는 철저한 성과주의 바탕이 있다. 미국에선 저성과자 해고를 당연시하지만, 한국에선 제도나 사회 분위기상 해고가 어렵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영자가 재택근무를 전면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재택 하면 논다? 집이라 더 신경 쓰여!

재택근무 하면 '논다' '딴짓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강하다. 경험자들은 이구동성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인다"고 말한다.

국내 제조 회사 중 드물게 2012년 재택근무제를 도입한 유한킴벌리의 최민영 차장은 2016년, 2019년 각각 3개월씩 재택근무를 했다. HR(인사) 담당인 최 차장은 "재택근무 정책 담당자로서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회사에서 찾기 전 미리미리 업무 진행 상황을 업데이트해 일을 놓지 않고 있다는 신호를 주려 했다. 꼼짝없이 온종일 컴퓨터 앞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제도를 만들어 놔도 사용자가 많지 않았다. 확산하려면 리더들이 먼저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아이 돌봄 스타트업 '째깍악어' 유연 팀장은 육아 때문에 5개월째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주 1회 주간 회의만 참석한다. 직원 30명 중 유일한 재택근무자다. "회사의 모험이자 배려라는 걸 아니 도리어 심리적 압박이 있어요. 메신저에 알람 뜨면 바로바로 확인하고 피드백 보내요. 동료들이 집에 있는데 더 소통이 빠르다고 해요(웃음)." 단점은 외로움이라고 했다. "옆자리 동료 없이 혼자 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료의 온기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한국 지사는 일수 제한 없이 개인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한다. 정다정 인스타그램 홍보이사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니 눈치 주고 눈치 받는 사람이 없다. 일하는 공간이 집이냐 회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분명하다. 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성과가 없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데 조직원들의 명확한 합의가 있다"고 했다.

이상과 현실은 종종 엇갈린다. 한 다국적 기업 직원은 "재택근무를 100% 자율에 맡기면 회사에 나와 일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외국처럼 집이 커서 업무용 방을 따로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과 삶의 분리가 모호해지고 집중이 안 돼 사무실로 다시 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덴버에서 재택근무하는 동료와 화상회의를 하는데 뒤쪽 창문 밖으로 산이 펼쳐져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런 곳에서 재택 하는 것과 아이 장난감 뒤죽박죽인 코딱지만 한 아파트에서 애 못 들어오게 문 걸어 잠그고 일하는 건 다른 차원이겠다 싶었어요(웃음)."

스킨십 중시하는 기업 문화, 재택 걸림돌

"회의 날짜를 모두 출근하는 날로 맞추려니 자꾸만 일 처리가 미뤄지는 겁니다. 여러 규칙을 만들어 해결하려 했더니 재택근무가 무색해지더군요. 답은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창업 초기부터 재택근무를 시행해온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 이동건 대표는 "재택의 성패는 '정보 공유'에 달렸다"고 했다. "사무실로 출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재택근무자는 필연적으로 저성과자가 될 수밖에 없다. 회사에 있든, 집에서 근무하든 필요한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IT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택근무자가 만들어내는 성과를 분석·관리하는 프로세스도 중요하다. 개발자들이 월 최대 2회 재택근무할 수 있는 '티몬'은 시행착오를 거쳐 성과 체크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티몬의 한 개발자는 "시행 초반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이틀 전 신청서를 내고 재택근무를 한 뒤 회사 서버에 작업한 결과물 링크를 간단히 올리는 식으로 업무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과정이 있어야만 다음 재택근무를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리더십 전문가인 최철규 'HSG 휴먼 솔루션 그룹' 대표는 "미국처럼 '저맥락 문화(low context culture·직설적으로 소통하는 분위기)'에서는 재택근무가 쉬운데, 한국 기업 문화는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 배경과 상황을 알아야 소통하는 분위기)'라 원거리 소통이 불편하다"고 했다. 임원과 '스킨십'을 하며 행간을 읽는 게 능력으로 여겨지는 한, 재택근무는 요원하다는 말이다.

전 직원이 집에서 일해… 사무실 비용 아껴 발리 워크숍 갑니다 100% 재택근무 '스터디파이'

조선일보

스터디파이 김태우 대표.


전 직원이 집에서 일한다. 사무실은 우편물을 받기 위한 형식적인 공간.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람은 없다. 6개월에 한 번 해외에서 전 직원 워크숍을 한다.

이런 회사가 국내에 있다. 지난 2018년 문을 열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교육 스타트업 '스터디파이'. 국내에 드문 100% 재택근무 회사다. 직원은 12명으로 적지만 이 규모에서도 전원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는 찾기 어렵다.

"요즘은 온라인툴이 워낙 발달해 사무실로 출근해도 대부분 업무가 디지털로 이뤄집니다. 이걸 보며 처음부터 100% 재택근무 하는 회사를 생각했어요. 출퇴근에 허비되는 시간을 최소화해 일에 몰입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어요." 이 회사 김태우(32) 대표가 말했다.

창업 전 오토매틱, 깃랩, 인비전 등 사무실 없이 직원 수백명이 100% 원격 재택근무 하는 해외 기업 사례를 연구했다. 현재 메신저는 '슬랙', 화상 회의는 '구글 미트(Meet)'와 '줌(Zoom)', 업무 관리 프로그램은 '아사나(Asana)'를 사용하고 있다. 오프라인 회의는 월 1회. 4·10월엔 국내에서 2박 3일 워크숍을 한다. 1·7월엔 열흘 정도 외국에 나가 함께 생활하면서 회의 겸 워크숍을 한다.

"계산해보니 사무실을 임대해 운영하려면 직원 한 명당 한 달에 60만원꼴로 비용이 들었다. 재택으로 이 비용을 절약해 6개월에 한 번씩 모두 해외에 가서 워크숍을 한다"고 했다. 작년 1, 7월엔 각각 호주 브리즈번, 인도네시아 발리로 갔다. 지난달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워크숍을 떠났다.

김 대표는 "취업난도 심하다지만 회사 입장에선 구인난, 채용난이 매우 심하다"며 "재택근무를 도입하니 육아하는 사람, 지방 근무자, 해외 근무자 등 채용 풀이 확 넓어져 좋은 인재 뽑기도 수월해졌다"고 했다.

또 “원격 근무는 ‘널널하다’고 생각하는데 착각”이라고 했다. “회사로 출근해 9시간 자리에 앉아 있으면 겉보기엔 열심히 일한 걸로 보이지만, 그 시간 동안 아무 성과 없이 앉아만 있다가 가는 사람도 많다. 재택근무를 하면 오히려 시간 내에 회사가 원하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야 하니 압박이 심하다”고 했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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