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0 (금)

秋는 상명하복을 거부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秋의 그 말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법무부장관과 거짓말쟁이 역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영석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더러 ‘상명하복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가상 사례가 아니다. 지난 3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한 말이다. 그는 검찰이 상명하복 문화에 푹 젖어 있다고 지적하며, 신임 검사들을 향해 “그것을 박차고 나가서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충만한 보석 같은 존재가 돼 달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흔한 덕담 같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생각해보자. 추미애는 법무부 장관이고, 법무부 장관은 검사의 '윗사람'이다. 추미애가 하지 말라는 '상명하복'에서 '상'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임 검사들은 추미애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따르지 말아야 하는가?

신임 검사들이 '상명하복하지 말라'는 추미애의 말을 따른다면 그들은 결국 상명하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순이다. 그렇다고 상명하복을 하지 않으면 '상명하복하지 말라'는 명령을 이행하는 꼴이다. 또 역설에 빠지고 만다. 이렇듯 한 명제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에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게 되는 것을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는 '추미애의 역설'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일곱 현인 중 하나로 꼽혔던 에피메니데스가 남긴 시에 등장한다. 그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입을 빌려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저 말은 참인가, 거짓인가?

두 세기가 지난 후 밀레토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도 비슷한 화두를 던졌다. '누군가 지금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참말을 하는 것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논리적으로 빈틈이 있는 에피메니데스의 시와 달리 에우불리데스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명확하게 구현해냈다. 하지만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읽고 저 질문을 떠올렸다고 볼 근거는 없다. 애초에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가 언어와 논리의 한계 때문이니, 우연히 같은 문제에 부딪힌 결과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이제 독자 여러분도 추미애, 아니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처음에 깨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파악하고 나면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같은 문장은 어떤가? 물론 역설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말 것' 같은 명령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둘로 나눌 수도 있다. 거짓말쟁이와 정직한 사람 사이에 중간이 없다고 한 후, 문재인은 '김정은은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김정은은 '문재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문재인의 말이 참이라면 김정은의 말 때문에 문재인의 말이 거짓이 된다. 문재인의 말이 거짓이라면 김정은의 말이 거짓말이므로 문재인의 말은 참이 된다. 어떻게 해도 두 사람 모두가 역설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거짓말쟁이의 역설 그 자체는 앞서 말했듯 기원전 6세기에 발견되어 4세기 무렵 논리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지 인류가 깨닫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서였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이고 평화 운동가로서 활동한 실천적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 덕분이다.

그의 청년 시절,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해 수천 년간 당연히 옳다고 여겨진 수학과 논리학의 체계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거목이 넘어지면서 햇살이 비쳤고 새로운 수학적 사고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독일의 논리학자 고틀로프 프레게는 수학에 논리적으로 확실한 바탕을 제공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러셀도 그 목표에 공감했다.

하지만 러셀은 논리학의 밑바닥에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구멍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론에 적용한 결과, 그 유명한 '러셀의 역설'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러셀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고는 그 집합에 스스로가 원소로 포함되느냐 아니냐를 물었다. 결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다. 역설에 봉착하고 만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과학으로, 과학을 수학으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려던 거대한 꿈은 이렇게 역설 하나에 풀썩 허물어지고 말았다.

러셀의 역설, 혹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집합에 속하는 원소가 마치 자신은 그 집합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명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라는 집합에 속하는 이, 혹은 크레타섬 사람인 누군가가 마치 거짓말쟁이나 크레타섬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할 때 역설이 발생한다. 추미애의 역설이 등장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검사들의 인사권을 휘두르는 권력자가 마치 '윗사람'이 아닌 양 상명하복을 거부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논리와 윤리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논리가 윤리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논리도 없는 자들이 윤리적일 수는 없다. 러셀과 동시대의 위대한 천재들이 완전무결한 논리적 바탕 위에 인류의 모든 지식을 세우려 했던 것은 결국 완전무결한 윤리를 추구한 것과도 같았다. 추미애가 택한 길은 그와 정반대다. 그는 아주 기본적인 논리까지 무시해가며 윤석열 검찰총장과 검사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세상이 완벽할 수만은 없다. 모든 것에는 한계와 모순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정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추미애의 역설'은 더 큰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것 아닐까?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 신라젠 주가 조작과 우리들병원 특혜 대출, 라임 사건과 사모펀드 대출 의혹 등, 검찰이 인지하고 수사에 나선 정권 관련 비리 사건이 줄줄이 폭발하기 직전인 상황이니 말이다.

'추미애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이 아니면 된다. 청와대 공소장 비공개라는 전례 없는 행위를 한 이유가 정권 차원의 비리 수사를 덮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사임하지 않는다면 탄핵감이다. 이것은 좌우와 보혁을 넘어 논리와 비논리, 참과 거짓, 도덕과 부패의 싸움이다.

현 정권은 크레타섬인가? 참말을 하고 있는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어설픈 역설을 뿌리며 도망가도 소용없다. 결국 심판받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