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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기자칼럼]착한 사람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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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일하며 가장 뿌듯한 순간은 문제가 해결될 때입니다. 복잡한 문제들이 기사 한 번 썼다고 풀리진 않지만 도움이 될 수는 있으니까요.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뿌듯함보다는 아쉬움과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제게 가장 아프게 남아 있는 ‘결국 도움이 되지 못한 기사’를 꼽아봤습니다.

경향신문

지난 7월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 박동운씨, 박미심씨, 허현씨를 만났습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조작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이들은 재심에서 무죄가 밝혀졌지만, 박근혜 정부가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범위를 크게 좁히는 법논리를 만들어내며 손해배상에서 제외됐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 판결이 잘못됐다고 결정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도 박씨 가족에게 배상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8월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명되고 9월 법무부가 ‘김제가족간첩단 조작사건’에 대한 항소를 포기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다른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늦게라도 손해를 배상하는 것은 정부가 선별적, 시혜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10월 조 장관이 취임 한 달 만에 낙마하면서, 이 문제는 잊혀졌습니다. 38년 동안의 이야기를 묻고 들으며, 괜히 상처만 헤집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5월엔 ‘산업재해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의 황상기씨, 김용만씨, 김미숙씨를 만났습니다. “다시는 내 자식 같은 죽음이 없기를 바란다”는 ‘다시는’의 활동은 많은 주목을 받았고, 김미숙씨는 10월 아들의 이름을 따 ‘김용균재단’을 창립했습니다. 노동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몬 ‘특성화고 기업체 현장실습’은 별다른 보완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전 문제는 “취업률 떨어진다”는 비판 속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7월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실습생들의 수당을 최저임금의 70% 수준으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네, 올린 게 그 정도입니다. 안전관리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면 기업의 책임 있는 관리자를 처벌하도록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계류 중입니다. 황상기씨는 인터뷰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내 자식 죽은 얘기 자꾸 하기 싫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될 때까지 목이 터져라 얘기해야지 어쩌겠어요.”

1년 전 12월엔 ‘일본 미투의 상징’ 이토 시오리 기자를 만났습니다. 방송사 간부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밝힌 이토는 오히려 ‘꽃뱀’ 취급을 당하며 일본을 떠나야 했습니다. 수사관이 유력한 증거까지 채취했지만, 누군가의 압력으로 수사는 중단됐고 가해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18일엔 민사재판이 선고될 예정이지만, 이토의 승소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김한민 작가는 <아무튼, 비건>에서 한 친구의 냉혹한 현실비판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건 신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가족, 친구, 학벌, 돈, 부동산, 성공도 아냐. 이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건 ‘세상은 안 변한다’는 믿음이야.” 정말 그럴까요? 생의 대부분을 ‘빨갱이’라 불리며 산 이들은 다른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을 도우며 살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아직’ 살아 있는 남의 자식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돈과 시간과 마음을 내어놓았습니다. 살해 위협 속에서도 어떤 여성은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경찰 황용식은 연쇄살인범 ‘까불이’에게 말했습니다. “니들이 많을 것 같냐, 우리가 많을 것 같냐? 나쁜 놈은 백 중에 하나 나오는 쭉정이지만, 착한 놈들은 끝이 없이 백업이 돼. 우리는 떼샷이여.” 2020년은 부디 ‘착한 사람들의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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