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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시론] 통화정책의 새로운 고민 / 나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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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원준 ㅣ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오늘날 세계 각국은 저성장과 저물가를 배경으로 통화정책 기준금리를 낮은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를 두고 거시경제의 균형을 떠받치는 ‘중립금리’의 추세적 하락을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중립금리는 잠재성장률과 밀접히 관련된 개념이다. 중립금리 자체도 떨어졌지만, 성장이 더디거나 물가상승률이 너무 낮으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중립금리보다 낮춰 경제주체들의 지출을 자극한다. 그런데 금리에는 0%라는 잠정 하한이 있으므로 기준금리가 낮을수록 이를 더 낮출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우리 경제도 잠재성장률이 올해 하락하고도 약 2.5%로 추정되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2% 밑으로 유지해온 최근 수년간 통화정책은 완화적으로 운영된 셈이다. 그럼에도 눈앞의 현실은 디플레이션 우려와 지속되는 경기부진이다. 완전고용이 전제된 이론 속의 중립금리라는 것이 비자발적 실업이 만연한 실제에서는 너무 높은 탓일 수 있다. 경제학자 루이지 파시네티는 금리가 높으면 지출 성향이 낮은 불로소득계층으로 소득 재분배가 일어나 경제가 위축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은이 기준금리를 현재의 1.25%보다 낮추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가 더 어려워진 이유는 기준금리가 실효하한에 근접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네가지 사항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내외 금리 차이가 얼마까지 벌어질 수 있는가이다. 기준금리 인하로 금리 차가 커져도 경제여건이 나아지면 외국인 투자 자금의 이탈은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위계 및 환율변동 측면에서 그 한계는 여전하다. 두번째 점검사항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물가하락 기대가 자리잡아 저성장과 저물가가 심화될 가능성이다. 다만 실효하한에서도 저금리를 장기간 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시각이 정설에 가깝다.

세번째 사항은 기준금리 인하의 거시건전성에 대한 영향이다. 경제부문별 자금수지의 합은 항상 영(0)이므로 경상수지 흑자가 계속 줄면 정부나 기업이 레버리지(차입)를 키우기 전에는 가계대출이 앞으로도 축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경기부진의 지속으로 시중 유동성이 부동산으로 쏠릴 가능성은 통화당국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기준금리를 올릴 때 가계의 이자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보유세 부담이 적은 주택시장이 통화정책의 여력을 위아래로 제한하는 셈이다. 끝으로 통화정책의 효과가 경기 국면에 따라 비대칭적인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실을 당길 수는 있어도 밀어낼 수는 없듯 말이다.

이상의 점검사항을 고려하면 기준금리는 이미 실효하한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기준금리 인하 여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경제학의 표준적인 통화정책 제안은, 미래 정책에 대한 민간의 기대를 변화시키는 접근 방식이다. ‘평균 물가상승률 목표제’와 같이 민간의 물가상승 기대를 자극할 수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용이한 대안적 통화정책 운영체제는 그런 관점에서 검토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의도대로 민간의 기대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준금리가 실효하한에 더 가까워지면 기준금리를 대신해 저성장과 저물가의 고착화에 대응할 통화정책 수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양적완화와 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대한 고민은 지금 시점에서 성급한 것만은 아니다. 장기국채 매입으로 유동성 공급을 기조적으로 늘리는 양적완화는 금융시장 불안을 통제함으로써, 소득분배의 개선으로 수요 측면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구조개혁을 지원할 수도 있다. 단, 영(0)보다 큰 실효하한 금리에서 양적완화를 하려면 기준금리와 중앙은행 대기성 수신금리를 공히 그 실효하한에 일치시키는 통화정책체계(floor system)를 도입해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 경제가 양적완화를 시작하는 상황이 된다면, 외국 사례에서 나타난 문제를 반복할 이유가 없다. 그 일환으로 한국은행은 정부와 함께 에너지전환 등 핵심 과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전략적 양적완화를 고려할 수 있을 법하다. 이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새로운 조합이다. 통화정책이 새로운 고민을 요구받는 때이다. 다가올 미래에 통화정책이 경제에 긴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내일을 여는 투자에서도 화폐를 희소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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