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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W포럼]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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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10여년 전 옆집에 일본 주재원으로 살았던 가족이 이사 왔다. 직장생활로 바쁜 나는 주로 정해진 분리수거 날 옆집 아주머니를 만난 적이 많았는데, 그는 좀 달랐다. 모든 페트병의 포장 비닐을 하나하나 분리하고, 우유 팩은 물로 씻고 가위로 잘라 차곡차곡 접어서 버리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 스티로폼은 설거지해서 버리는지 깨끗해서 마치 새것 같았고 유리병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기를 키워서 그런지 성격이 참 깔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일본 여행을 갔다가 쓰레기를 버리러 동네 마트 분리 수거함을 열어본 순간,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원칙대로 깨끗하게 배출된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음식물 양념이 묻어 있는 내 쓰레기를 감히 버릴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해서 그냥 들고 다시 차에 올라탄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 속에서 우리 국민은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고 일본 우익 정권에 맞서 보이콧 재팬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산 맥주는 마트에서 사라졌고, 일본산 자동차 영업은 몇 달째 고전하고 있다. 일본 여행객 감소로 항공편들이 없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으로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중국 대륙에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일본 자동차들이 불태워지고 여행객이 줄었다. 그런데 이웃 간에 관계가 회복되면 불매 운동은 끝나는 것인가? 다시 일본 맥주를 마시고 일본으로 여행 가서 일본산 제품을 한가득 사고, 품질 좋게 느껴지는 일본 차를 탈 것인가? 그러면 뭐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매운동에서 멈추지 말고 일본보다 더 협동적이고 더 조직적이고 더 배려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은 그 운동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 반일감정에 따른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압박으로의 불매운동은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일본을 앞서기 위해서는 일본을 뛰어넘는 성숙한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제대로 분리수거가 안 된 재활용품, 우유가 뚝뚝 떨어지는 종이팩, 김칫국물이 묻은 채 내동댕이쳐진 플라스틱, 고추장이 들어 있는 병들이 지금도 보인다. 고속도로에서는 "절대로 저 차보다는 뒤에 갈 수 없어!"라고 외치는 것 같은 스피드 레이서들의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철도 건널목 차단기가 있는 곳에서도 빨리 가려다 시동 꺼진 버스와 전철이 충돌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여태 몸에 밴 '나만 편하면 돼, 나만 아니면 돼'를 버릴 때가 온 것이고, 그런 행동에 부끄러움을 깨달을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움트는 시민의식이 꽃을 피우도록 운동을 확산시켜야 할 때다. 개인이 하기 어려운 기술 독립, 국방 독립보다는 내가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는 것, 잘못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깨닫는 것.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 선수를, 이상화 선수가 고다이라 나오 선수를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일본보다 더 협동적이고 더 조직적이고 더 배려하는 사회가 정착됐을 때 비로소 안타깝게 쓰러져간 독립투사들의 미소가 번질 것이다.


서재연 미래에셋대우 갤러리아WM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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