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1 (토)

[태평로] "딱 보니 100만"이라는 절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美 관료·군인, 대통령에도 반기… 政派 떠나 직업 규범 엄정 구현

韓 엘리트 집단 직업적 타락이 안보·경제 위기, 갈등의 한 원인

조선일보

조중식 국제부장


최근 진행된 미국 하원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을 보면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물이 떠올랐다. 김어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서초동에서 진행된 '조국 지지 집회' 참가자 수에 대해 "딱 보니 100만"이라고 한 MBC 보도국장이다. 보도국장은 방송사 '기자들의 대장'이라 할 수 있다. 기자라는 직업의 기본 중의 기본이 팩트(사실)를 확인하는 것이다. 큰 특종 기사를 쓰고도 혹시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자의 대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확인했다'는 말은 없이 "딱 보니 100만"이라고 했다. 직업적 타락이자 기자라는 존재의 부정이다.

트럼프 탄핵 청문회에는 백악관과 국무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심지어 사표를 내면서까지 증언에 나선 군인과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통령 개인을 지키기보단 자신의 직무(職務)가 요구하는 올바름에 순종했다. 불이익이 있더라도 공적인 책임을 다하겠다는 자기 희생적 공덕심(公德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안보회의(NSC) 소속 알렉산더 빈드먼(44) 중령도 청문회 출석 금지 지시를 받았으나 정복을 입고 의회로 나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는 "오늘 내가 입은 건 미 육군의 제복"이라며 "군인은 특정 정당이 아닌 국가에 봉사한다"고 했다. 한 의원이 그를 "미스터 빈드먼"이라고 부르자 그는 "빈드먼 중령입니다"라고 정정했다.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거듭 강조한 것은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의 미국은 현직·현역 신분임에도 상관을 거스르는 증언을 한 수많은 빈드먼들이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시리아 철군 방침에 반발해 사표를 낸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개별 징계 사안에까지 정치적으로 개입한 대통령에게 맞서다 경질된 리처드 스펜스 전 해군장관도 그런 인물이다. 영국 관료 사회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주미 브렉시트 특사가 "브렉시트에 대한 반쪽짜리 진실을 팔고 명백히 당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이들은 자신이 군인인 한, 관료인 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직업적 신념과 가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이런 직업 규범을 구현하고 있는가. 직업적 타락과 존재를 부정하는 행태가 너무 많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이동식 발사 능력 여부에 대해 국방장관이, 국방 정보를 총괄한다는 현역 장성이, 청와대 안보실장 말에 맞추느라 정반대로 말을 뒤집었다. 이들이 국방장관이고 군인인가.

성장과 일자리, 빈부 격차 등 경제의 전 분야 지표가 꼬꾸라지거나 악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 관료들은 "하반기가 되면" "내년 상반기에는" 소리만 반복한다. 엄연한 팩트가 있는데 통계의 단면만을 교묘하게 부각시켜 유사 종교 집단 같은 맹신을 고집한다. 이들에게 직업적 자존심이 있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전공한 예일대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는 정치 지도자들이 부정적 본보기가 될 때 직업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했다. 법률가 없이 법치를 파괴하거나, 판사 없이 보여주기식 재판을 진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통치자에게는 복종하는 공무원이 필요하다. 스나이더는 "직업의 구성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규범과 규칙을 지닌 집단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일종의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기자들이, 관료들이, 군인, 법조인, 기업인, 여타의 직업인들이 기본적인 직업 규범을 지켜내는 것만으로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조중식 국제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