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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기고] 협상 애걸하는 북한과 위험한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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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설정한 미·북 협상 시한이 다가오자 북한은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동창리에서 로켓엔진 실험을 하고 조만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테스트를 할 기세다. 때맞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김정은에 대한 시한부 사랑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며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는 동시에 "트럼프를 망령 든 늙다리라고 김정은 위원장이 아직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망령 든 늙다리라고 부르면 그만인 것을 굳이 아직 안 불렀다고 강조하는 것은 전형적인 약자의 어법이다.

김정은이 연말을 협상 시한으로 정한 이유는 '하노이 노딜'로 총체적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제재 완화가 무산돼 주요 수출이 막히고 석유 수입도 대폭 제한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황제처럼 모시며 제재 이행 완화 의사를 비공식 확인했겠지만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 지도자가 중국의 시혜에 무한정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 또한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접근 방식을 미국이 수용해야 보상을 챙기면서 동시에 핵 생산도 계속할 수 있는데, 미국이 셈법을 바꾸지 않으면 협상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김정은은 큰 고민에 빠져 있다. 연말 시한 전에 미국이 북한식 협상에 응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가능성은 낮다. 시한이 지나면 놀랄 만한 도발로 독재자의 위신도 살리고 미국에 충격을 주고 싶지만 리스크가 크고 실익은 불분명하다. 북한 입장에서는 ICBM을 완성하는 테스트는 언젠가는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국 본토 공격 능력이 입증되고 소위 대미 억지력이 완성된다. 그러나 타이밍이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 가능성이 높아질 때 ICBM 테스트를 하면, 판을 흔들어야 하는 트럼프에게 드라마틱한 행동의 빌미를 주는 것이다. 트럼프가 재선된 후에는 자신감에 충만하고 거칠 것 없는 미국 대통령에게 크게 당할 수가 있다. 김정은에게 제일 좋은 타이밍은 탄핵 프로세스가 진행되긴 하는데 그래도 재선 가능성이 높아서 트럼프 대통령이 몸을 사릴 때이다.

북한 권력자는 종교적 광신도가 아니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집단이다. 그래서 힘의 논리에 충실하며, 미국과 잘못 부딪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부딪치려 하면 중국이 먼저 북한 목을 죈다는 것도 안다. 한반도 전쟁을 몹시 꺼리는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레드라인에 민감하다.

지금 미국에는 북한의 도발을 일단 지켜본 후 대응하는 방안과 협상을 통해 북한 문제에 당분간 뚜껑을 덮어두는 방안이 있다. 완전한 비핵화는 장기 목표로 남겨둔 채 핵실험과 ICBM 테스트를 막고 북핵 양산과 미사일 고도화를 늦출 수 있는 임시방편책을 큰 보상을 안 주고 마련할 수 있다면 미국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다. 북한 사정이 얼마나 절박하냐에 따라서 그러한 협상을 시도해볼 수는 있다.

지금부터 북한과 미국이 주연이고 중국이 조연인 북핵 게임이 숨 가쁘게 전개될 것이고 어떤 시나리오이건 우리 안보에 직결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미국·북한·중국 어느 누구도 한국 정부와 심도 있는 협의를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나 국민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대책 없이 비핵화와 평화의 허상에 사로잡혀 외교도 안보도 다 놓친 지난 세월의 무게가 지금부터 더 뼈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황준국 한림대 객원교수·전 주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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