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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시가 있는 월요일] 할머니 손에 키워진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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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구름도 시름시름 늙어 아프면

땅바닥에 내려와 눕습니다 할머니

정거장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그 늙은 구름들을 묻을

땅을 파고 놀았습니다

십 년을 그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를 기다리며

그 늙은 구름들이 묻힌 땅을 밟고 서 계십니다

어쩌면 내가 묻어준 그 늙은 구름들 속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몇 박스의 꿈들도

묻혔나 봅니다

할머니 당신이 이토록 작은 몸 웅크리며

떨고 있습니다

이제 마중 나오지 마세요 나도 이젠 어른이에요

- 신기섭 作 '안개' 중


정거장에 나가 할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소년은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됐다. 이제는 할머니가 청년이 된 손자를 기다린다. 손자는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서 있는 할머니에게 이제 마중 나오지 말라고 말한다.

어느 변두리 정거장의 풍경이지만, 풍경 그 이상의 파장이 있는 시다. 할머니 손에 키워진 소년. 매일매일 구름을 땅에 파묻으며 할머니를 기다리던 소년. 그리고 어른이 된 소년의 눈에 비친 할머니.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할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세상에 없다. 이 시를 남기고 얼마 후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할머니를 만났을까? 물을 수가 없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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