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정용덕칼럼] ‘고무도장’ 위원회가 많은 이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韓정치 짧은기간 획기적 발전 / 질적 측면 아직 가야 할 길 멀어 / 다원주의 의사결정 실현 안 돼 / 집행자가 위원회 참여해서야

한국에서 민주화가 시작된 시점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민주화의 시작을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으로 ‘문민화’가 이뤄진 1993년을 기점으로 보는 시각,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여·야당 간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8년을 기점으로 보는 시각 등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정파가 아닌 제도를 중심으로 보자면, ‘6·10 시민항쟁’에 의해 제6공화국 헌법이 들어선 1987년을 한국 민주주의의 이행 시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세계일보

정용덕 서울대 명예교수 행정학


이 헌법에 따라 그해 오늘 제13대 대통령이 국민 직선으로 선출됐다. ‘유신’에서 ‘5공’까지 15년(1972~1987)의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그 후 32년 동안 5년마다 모두 7차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민주주의 공고화의 ‘두 차례 검증’ 요건을 넘어, 무려 3차례에 걸친 정당 간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1988년의 헌법재판소 설립과 1991년의 지방자치제 ‘부활’도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초석이 됐다.

이렇듯 제도와 형식에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획기적인 정치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질적 측면에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최근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끊임없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직접 민주주의의 ‘전체주의적’ 요소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해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 간의 소위 ‘파당적 상호조정’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 방식의 의사결정은 국회를 비롯해 거의 모든 집단에서 혹은 집단 간에 실현되지 않고 있다. 국가와 사회 간의 관계에서 국가주도의 ‘코포라티즘’(직능별 대표체제)에서 다원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자면 보다 긴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도기적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으로의 이행조차 아직은 찾아보기 어렵다.

논의의 범위를 좁혀, 각종 조직의 내부의사결정 기제에 초점을 맞춰 봐도 마찬가지다. 공사 부문을 막론하고 조직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한 제도로 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피라미드형 독임제 조직에서 수장에 의한 전횡을 방지하고 다양한 의견이 의사결정에 반영되도록 하기 위한 조직화 원리다. 그런데 이 목적이 제대로 구현되는 위원회는 공사 부문을 막론하고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행정에서 위원회형 조직은 크게 세 유형이 있다. 첫째, 공정위, 금융위, 인권위, 권익위 등 위원장이 기관장이 되는 중앙행정기관형 위원회다. 둘째, 감사원(감사위원회), 경찰청(경찰위원회), 국무총리실(정부업무평가위원회) 등 독임제 행정기구 안에 심의의결권이 있는 위원회를 두는 경우다. 셋째, 법무부 혁신위원회처럼 의결권이 없는 자문위원회로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들은 모두 행정에서 민주성, 대표성, 전문성, 공정성 등이 특별히 필요한 기관에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늬만 위원회지 내용상으로는 독임제와 별 차이 없이 운영된다.

중요한 원인 가운데에는 집행사무 관리자가 위원회에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포함된다. 공정위, 금융위, 권익위의 집행사무를 관장하는 부위원장이 위원회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정보를 가지고 사무를 총괄하면서, 위원장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집행 관리자가 위원으로 참여하는 경우, 위원회 의사결정이 위원장과 그 집행사무 관리자에 의해 주도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위원회의 유명무실은 사적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 법인이사회에 집행책임자인 총장이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것이 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민간기업의 경우는 여기에서 한술 더 뜨고 있다. 기업 총수가 실제 영향력은 뒤에서 행사하면서도, 이사회는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법적 책임을 최대한 피하는 소위 ‘그림자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 의장인 대통령이 소홀히 여기는 대한민국 최고 위원회인 국무회의가 ‘고무도장’에 불과한 것과 판박이다. 위원회, 즉 ‘의회’가 결정하면, 행정의 ‘관리자’가 집행하는 미국 지방정부의 정치·행정 이원론이 개혁의 방향이다.

정용덕 서울대 명예교수 행정학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