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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한평생 “기술·사람”…한국 전자·화학산업 기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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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기업 첫 연구소 설립…국내 최초 19인치 컬러TV 등 개발

인재 육성 위한 교육에도 큰 관심…LG인화원·연암대학 세워

경향신문

고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2012년 2월 충남 천안시 연암대학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LG연암학원 이사장 자격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76년 9월 한·독 경제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서독(현 독일) 정부로부터 유공대십자훈장을 받고 있는 구 명예회장.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차에 시승해 웃고 있다. 1995년 1월 신년시무식 때 럭키금성 그룹이 LG로 새 출발할 당시 LG CI를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 구 명예회장이 1999년 4월 LG디스플레이 구미공장을 방문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왼쪽 사진부터). LG그룹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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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발자취는 ‘기술개발’과 ‘인재양성’으로 요약된다. 그는 일평생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뿐”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그의 기술개발과 사람에 대한 투자는 한국 전자·화학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공장에서 일한 ‘이사’

1950년 부친의 부름으로 교편을 내려놓고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한 구 명예회장은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공장에서부터 현장 경험을 쌓았다.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고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집 뜰의 가마솥에서 원료를 녹이면서 실험에 열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구 명예회장은 락희화학과 금성사 부사장에 오르는 동안 직접 부산 범일동·부전동·연지동 공장 등을 신·증축하면서 화학·기계·전기 분야에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했다. 1970년 그룹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20년간 생산현장을 지켰다. 한국의 2세 경영인 중 그만큼 현장을 잘 알고 기술을 잘 이해하는 기업인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는 늘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등 첨단 장비를 설치했으며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켜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설립된 연구소만 70여개였다. 구 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당시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며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했다.

구 명예회장이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그는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19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19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 내부 반대에도 최초로 기업공개

1970년 2월 LG그룹 모체인 락희화학은 민간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이어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기업공개(IPO)를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국내 민간기업이 기업공개를 한 사례도 전무했다. 일부 임원들은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지만 구 명예회장은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내다봤다.

국내 기업으로서 최초로 해외에 생산기지를 세운 사람도 구 명예회장이었다. 그는 1982년 미국 앨라배마주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한국 최초의 해외 생산공장이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50여개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 “미완의 대기에 더 큰 기대”

구 명예회장은 자신의 저서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완성된 작은 그릇보다는 가꾸어 크게 키울 수 있는 미완의 대기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고 적었다. 인재 선발도 중요하나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제도에 무게를 두고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1988년에는 ‘기업의 백년대계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며 LG인화원을 설립했다.

부친이 1969년 설립한 LG연암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대학교수의 해외연구 지원 사업을 펼쳤고, 특히 교수 지원 사업에 애착이 컸다. 1973년 학교법인인 LG연암학원을 설립하고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양성을 취지로 1974년 천안에 연암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984년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학을 세웠다. 1991년에는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펴고자 LG복지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 정·재계 인사들 조문

장례 이틀째인 15일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는 비공개 가족장이지만 일부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범LG 구씨 일가와 동업 관계였던 허씨 일가를 비롯해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이 조문했다.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문희상 국회의장·이낙연 국무총리 등이 보낸 조화가 놓였다. 이 총리는 페이스북에 “1980년대 정부서울청사 인근 허름한 식당에서 일행도 수행원도 없이 혼자 비빔밥을 드시는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뵈었다.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고 생각한다”는 추모글을 올렸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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