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다. 은행 취업에 성공한 학생을 배출하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특성화고도 여전히 많다. 지금은 은행들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어 기존 직원들에게 거액을 줘 가며 희망퇴직을 시키고, 그 자리에 매년 수천명씩 신규채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독일의 도이체방크가 지난 7월 1만8000명의 감원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인 은행들도 대규모 인력감축에 들어갔다. 한국의 은행들이라고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혁신은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질도 악화시킬 수 있다. 요즘 혁신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타다, 배달의민족(배민) 등 플랫폼기업들이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을 서비스에 연결해 번창 일로에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연금, 건강·고용·산재보험 등의 4대보험과 야간·휴일수당, 퇴직금 등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이 숨어 있다. 이들 플랫폼 노동자들은 당장 현금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기존 유사한 노동을 할 때보다 많을 순 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 생기는 유·무형의 손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 열악한 직업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혁신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돈을 번다. 공짜 혁신은 없다.
혁신기업들은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의 혁신이 오롯이 그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혁신산업이라는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앞선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축적된 기술과 산업의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많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가가 만든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간접자본도 완비돼 있어야 사업이 가능하다.
아무리 특출한 혁신기업도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타다나 배민의 매출이 늘어나려면 버스가 아니라 타다를 이용할 수 있고, 탕수육과 족발을 주문해 먹을 여유가 있는 은행원 같은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디지털에, 핀테크에 혁신에 혁신을 한 은행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 같은 이들이 저축을 하고, 대출도 받아야 한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늘어야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성장하고, 이 기업들과 거래하는 은행이 수익을 낼 기회가 생긴다. 이 기업들이 고용도 많이 하고 노동자들의 급여도 올려줘야 타다를 이용하고 배민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안정적으로 소득을 올려야 근로소득세를 내고, 이들이 충분히 소비해 부가가치세를 충당해야 혁신기업들이 사업하기 좋도록 사회간접자본이 정비되고 관리될 수 있다.
혁신이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이뤄져야 지속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혁신기업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고 제도를 만들어주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만이 혁신을 위한 전부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을 칭송하는 것만큼 혁신의 그림자도 걱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더 그럴까. 이어지는 송년 모임에서는 우울한 얘기들만 귀에 들어온다. 동년배들 모임의 화두는 어느새 노후 걱정이 돼 가고 있다. 회사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먹고살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국민연금은 얼마나 되지, 그거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퇴직연금도 펑크 난다는데 중간정산 받을 방법은 없나 등등. 열정과 희망이 아닌 불안과 좌절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청년들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은 지 오래됐다는데 주변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은행원이나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나 성실하게 일하면 당장의 생계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어야 나라의 경제는 물론 정치도 건강해진다. 혁신만으로 이런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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