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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아침을 열며]혁신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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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론 이게 은행 지점입니다.” 얼마 전 만난 한 시중은행장이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면서 한 얘기다. 이 은행장 말처럼 요즘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대부분의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은행 지점 찾아가고,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하는 불편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참 편리한 세상이 됐다. 눈부신 기술혁신 덕분이다. 하지만 그 기술혁신으로 은행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은행권 취업자 수는 2015년 말 13만8000명에서 지난해 말 12만4000명으로 3년 새 1만4000명이나 줄었다. 지난 10월에는 국민은행이 서울에 무인점포까지 열었다.

경향신문

은행원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다. 은행 취업에 성공한 학생을 배출하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특성화고도 여전히 많다. 지금은 은행들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어 기존 직원들에게 거액을 줘 가며 희망퇴직을 시키고, 그 자리에 매년 수천명씩 신규채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독일의 도이체방크가 지난 7월 1만8000명의 감원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인 은행들도 대규모 인력감축에 들어갔다. 한국의 은행들이라고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혁신은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질도 악화시킬 수 있다. 요즘 혁신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타다, 배달의민족(배민) 등 플랫폼기업들이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을 서비스에 연결해 번창 일로에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연금, 건강·고용·산재보험 등의 4대보험과 야간·휴일수당, 퇴직금 등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이 숨어 있다. 이들 플랫폼 노동자들은 당장 현금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기존 유사한 노동을 할 때보다 많을 순 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 생기는 유·무형의 손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 열악한 직업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혁신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돈을 번다. 공짜 혁신은 없다.

혁신기업들은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의 혁신이 오롯이 그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혁신산업이라는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앞선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축적된 기술과 산업의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많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가가 만든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간접자본도 완비돼 있어야 사업이 가능하다.

아무리 특출한 혁신기업도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타다나 배민의 매출이 늘어나려면 버스가 아니라 타다를 이용할 수 있고, 탕수육과 족발을 주문해 먹을 여유가 있는 은행원 같은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디지털에, 핀테크에 혁신에 혁신을 한 은행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 같은 이들이 저축을 하고, 대출도 받아야 한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늘어야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성장하고, 이 기업들과 거래하는 은행이 수익을 낼 기회가 생긴다. 이 기업들이 고용도 많이 하고 노동자들의 급여도 올려줘야 타다를 이용하고 배민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안정적으로 소득을 올려야 근로소득세를 내고, 이들이 충분히 소비해 부가가치세를 충당해야 혁신기업들이 사업하기 좋도록 사회간접자본이 정비되고 관리될 수 있다.

혁신이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이뤄져야 지속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혁신기업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고 제도를 만들어주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만이 혁신을 위한 전부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을 칭송하는 것만큼 혁신의 그림자도 걱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더 그럴까. 이어지는 송년 모임에서는 우울한 얘기들만 귀에 들어온다. 동년배들 모임의 화두는 어느새 노후 걱정이 돼 가고 있다. 회사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먹고살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국민연금은 얼마나 되지, 그거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퇴직연금도 펑크 난다는데 중간정산 받을 방법은 없나 등등. 열정과 희망이 아닌 불안과 좌절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청년들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은 지 오래됐다는데 주변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은행원이나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나 성실하게 일하면 당장의 생계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어야 나라의 경제는 물론 정치도 건강해진다. 혁신만으로 이런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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