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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정동칼럼]지연된 정의는 무엇을 남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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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국회의장님!

2015년 연말이었습니다. 그때도 박근혜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결단’을 내린다 했었지요. 연로하신 피해자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해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일본 정부의 돈 10억엔으로 한국에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함으로써 ‘가장 어렵고 힘든 과거사’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주장했었지요. 그게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합의)였습니다.

경향신문

2019년 겨울, 문재인 정권하에서 국회의장님이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구국의 결단’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기억·화해·미래재단’을 설립하고 운영비는 한국 정부가 대며, 일정 기간을 두어 신청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하겠답니다. 연내에 관련 법안을 발의해 ‘한·일 간의 갈등’을 근원적·일괄적·포괄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하십니다. 소위 ‘문희상안’입니다.

의장님, 특정 시기의 중요성을 명분 삼아 급박한 시한을 정해,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모양새가 ‘2015 한·일합의’ 때와 너무 유사합니다. 가해자의 범죄사실 인정과 진정한 사죄, 법적 배상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없음은 물론 위자료 성격의 돈으로 가해 책임을 면제해 주겠다는 발상도 놀랍도록 같습니다. 한·일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부인과 왜곡, 피해자 비난을 일삼아 온 일본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요청해온 피해자가 되어 버린 느낌도 유사하고요.

의장님은 아마도 양국 정부가 주도한 기습 선언으로 국민적 반발을 쓰나미처럼 맞았던 ‘2015 한·일합의’의 악몽을 기억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래서 의장님 단독 플레이를 자처하며 일본 의원들과의 물밑 접촉으로 방향을 잡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정부와 여당이 눈도 입도 귀도 없는 양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이, 의장님은 일방적 선언, 언론 흘리기, 여론 살피기와 내용 바꾸기를 지속하셨지요. 처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섞고 ‘한·일 위안부 합의의 유효’함을 확인하자고 했다가 나중에는 빼시고, ‘기억인권재단’이라고 했다가 ‘화해’와 ‘미래’를 넣으시고, 기금 마련안도 ‘2+2+α’에서 ‘1+1+α’로 유동했습니다. 의장님 정도 되시는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국민적 반발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미리 유도해 김 빼기를 하고 있다면 너무 나간 걸까요. 피해자를 배제하거나 선택적으로 접촉하시고 제한된 의견 수렴 채널을 가동해 법안을 추진하면서도, ‘피해자중심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 또한 놀랍습니다.

의장님, 너무 참담합니다.

‘2015 한·일합의’가 일본 정부의 돈으로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려 했다면, 의장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는 한국 기업과 한국 국민의 돈까지 섞겠다고 합니다. 직접 연관이 없는 일본 기업으로부터도 자발적으로 기부받겠다고 합니다.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지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가해자의 위치를 소거하고, 법적 책임을 물을 피해자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2015 한·일합의’ 당시 그나마 있었던 마음의 위로라는 제스처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대한민국 국회가 법률로 못 박아 일본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요. 피해자의 대리인이 가해자에게 화해를 구걸하며 책임을 영구히 면탈시켜주고자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로써 야기될 피해자들의 혼란과 고통은 자명하거니와, 식민지 불법성에 항거하며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한·일 시민운동의 정당성과 명분, 국제사회에 축적해온 신뢰는 안으로부터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일본 내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한국 내 극우 반민족주의자들이 성장할 자양분 또한 스스로 제공하는 꼴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자처한 일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갈등과 분열을 겪는 사이, 일본은 아무런 대가조차 치르지 않고 뒷짐 진 채 불구경만 하게 되겠지요.

의장님의 국가에 대한 충정 그 자체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회가 나서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는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경시된 채, 무지와 오판, 소수의 담합으로 역사적 잘못이 추가되고, 다시 정치적 위기가 초래되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국익’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잘못, 이로 인해 또다시 지연된 정의는 결국 다음 세대에 계승되고 확장되어 더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용과 형식, 절차 모든 면에서 반헌법적·반역사적·반민주적인 ‘문희상안’을 당장 철회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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