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4 (금)

‘우리의 소리’ 따라 옮긴 발걸음... 천재시인의 거처에 다다르다 [S 스토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 방송사의 ‘우리의 소리를…’ / 전국서 채록한 1800여곡 음원 / 국악인·연구자·기관 등 기증해 / 11월 ‘우리소리박물관’ 문열어 / 국립민속박물관의 ‘낚시광’ / 한강에서 하던 전통적 ‘견지낚시’ / 도구 1002점 기증한 서병원 선생 / “전통인데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 / 개발로 헐릴 위기서 기부로 살아나 / 국민은행과 민간 후원해 리모델링 / 소박한 한옥집엔 시인의 정취 가득

‘백사 이항복 후손이 400년간 지킨 보물들, 국가 기증.’

이런 제목의 기사를 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지난달 21일 여러 매체에서 보도했던 뉴스입니다. 조선 선조대의 명재상 이항복의 초상화 등 17점을 후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그분입니다. 기증품은 그의 가문 종가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종부 조병희씨는 “박물관에서 (초상화 등 유물을) 널리 알려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기증의 기본적인 취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죠. 희귀하고, 아름답고, 혹은 학술적 의미가 중대한 ‘나의 소장품’을 ‘우리의 문화재’로 공유하겠다는 겁니다.

세계일보

기증은 문화재와 관련된 일들 중 가장 근사한 것이라 할 만합니다. 공유를 통해 유구한 역사와 일상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증자의 땀과 열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래서 문화재 기증을 테마로 박물관 투어를 떠나볼까 합니다. 동선을 생각해서 서울 종로구 창덕궁 맞은편의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 시작합니다.

세계일보

민간 기부금으로 구매해 문화공간으로 보존, 활용 중인 '이상의 집'. 문화재정 제공


#기증으로 태어난 ‘막내 박물관’

우리소리박물관은 지난달 21일 개관했습니다.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서울 소재 박물관들 중 막내쯤 된다고 해둡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터라 저도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지난 11일 처음 가봤습니다. 근사한 한옥인데 첫인상은 ‘사랑스럽다’고 할까요.

이름이 말해주듯 우리의 민요를 들려주는 박물관입니다. 낮고, 구수한 노랫소리가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사실 민요가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터라 처음 듣는 노래들이 많을 겁니다. 뱃사공들이 부른 ‘한강 시선뱃노래’라는 게 있더군요. 해학적이면서도 힘겨운 삶에 대한 고백에서는 짠해집니다.

“… 강비탈의 젊은 과부 뱃소리에 잠 못 이룬다… 어떤 사람 팔자 좋아 부귀영화 잘살 건만 우리 팔자 어이하여 배를 타서 먹고사나….”

서울시 소개에 따르면 우리소리박물관은 2만여 곡의 음원과 5700여 점의 악기, 음반, 관련 서적 등을 소장하고 있는데, 95% 정도가 기증품이랍니다. MBC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서 전국 900여 개 마을에서 채록한 1800여 곡의 음원을 내놨고 국악인, 연구자, 관련 단체 등 개인, 기관들이 동참했습니다. 서울시 최우진 팀장은 “구매를 하겠다고 해도 그냥 주면서 전시를 잘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전했습니다.

우리소리박물관은 가벼운 마음으로 민요를 즐겨도 좋고 외출 중에 잠시 쉬어가는 곳, 혹은 점심 식사 후 동료들과 잠시 잡담을 나눌 곳으로 방문해도 괜찮을 성싶습니다. 소장품이 박물관의 기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증 덕분에 이런 공간을 새로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까요.

세계일보

기증픔으로 마련된 지난해 국립민속박물관의 특별전 '기억의 공감'의 전시장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도피 중 인연... 낚시광의 기증품

이제 국립민속박물관(민박)으로 가보시죠. 우리소리박물관에서 걸어서 20분쯤 걸리려나요.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가는 길의 북촌 예쁜 거리와 가게를 즐겨도 좋을 겁니다.

상설 1전시실 한쪽에 자리 잡은 서병원 선생 부부 기증 ‘견지낚시’(파리채처럼 생긴 견지대를 이용한 낚시 방식) 도구 일체를 보면서 기증품이라서 더욱 풍부한 이야기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어느 박물관이나 전시품에 얽힌 이야기를 중시합니다. 보다 의미 있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란 유물의 출처, 사용 내역, 소장 경위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래된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런 게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민박의 주된 소장품인 민속유물들은 생활용품이 많아 더욱 그렇죠.

그러나 기증품들은 기증자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수집한 것들이라 상대적으로 이런 정보들이 명확합니다. 기증품을 수집하는 과정에 얽힌 재밌는 사연들도 많습니다.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난 서병원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할어버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낚시를 배웠습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시국사건에 얽히면서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검문을 받을 일이 없는 한강의 배 위를 도피처로 선택했습니다. 견지낚시와의 인연이 계기였죠. 한강을 수없이 오르내렸고, 선배 낚시꾼들의 장비를 얻는가 하면, 직접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은 낚시 도구의 대부분인 276건 1002점을 2017년 민박에 기증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다 떠오른다”는 소중한 수집품을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견지낚시가 사라져 가니 박물관에 맡겨 흔적이라도 잘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눈에 확 띄는 전시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낚시광’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세계일보

서병원 선생은 평생 모은 견지낚시 도구 1000여 점을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민간 기부로 살린 천재시인의 거처

이제 갈 곳은 박물관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기증의 사례라고도 할 수 없죠. 그러나 도심 개발 압력을 피해 살아남아, 지금은 각종 문화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게 개인, 기업의 기부 덕분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에 있지 않나 싶어 소개합니다.

‘이상의집’은 종로구 서촌 초입에 있습니다. 시인 이상이 1911∼1934년 살아서 그의 삶과 예술적 발자취를 떠올릴 수 있는 곳입니다. 한때 개발 압력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KB국민은행 등 민간의 후원을 받아 매입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지역사회, 시민단체 등과 함께 전시회, 회의장 등으로 활용되다 라이엇 게임즈의 후원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해 12월에 재개관을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보존, 활용되는 곳들이 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의 고택, 조각가 권진규 선생의 아틀리에 등이 대표적입니다.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민간의 기부는 증가 추세입니다. 그중에서도 라이엇 게임즈 같은 외국계 기업의 참여가 적극적인 게 눈에 띕니다.문화재청 장영기 전문경력관은 “한국에서의 브랜드 가치, 평판을 높이기 위해 전통문화의 상징물인 문화재 보호, 활용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계 기업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세계일보

지난달 개관한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 관람객이 전시품을 이용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콘크리트 기둥의 명판, 기증자 예우

기증의 의도, 과정 등을 두고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것은 칭송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평생에 걸친 열정과 노력이 담겨 있고, 때로는 큰 재산을 들인 소장품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겠다는 의지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방식의 예우는 당연합니다. 전시 패널에 기증자 명시, 기증품 활용 전시, 관련 도서 발간, 명패 설치 등이 대표적인 방식이죠. 최고 수준의 예우라면 기증실 설치일 겁니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정원에 횡으로 열지어 있는 기둥들을 보시죠. 그중 5개에 1940년대 이후의 기증자 이름을 새긴 명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는 장소에 세운 기둥에 명판을 설치해 기증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제 얼마 전 개막한 ‘가야본성’ 전시실로 가보죠. 우수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가야의 힘을 보여주는 전시회 3부의 대표 유물이 ‘말 탄 무사모양 뿔잔’(국보 275호)입니다. 이 뿔잔은 이양선 선생이 1980년대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666점 중 하나입니다. 서원대 이광표 교수는 최근 발간한 책 ‘명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이양선 컬렉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것(말 탄 무사모양 뿔잔)은 유럽에서 열린 ‘한국미술 5천년전’에 출품되어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경주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품의 하나다. 이양선 컬렉션 가운데엔 국내에 그 예가 드문 것도 적지 않다. 일본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딸린곱은 옥, 청동에 옻칠을 한 호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시동 2층에 가면 걸출한 컬렉터들의 이름을 딴 기증실이 있습니다. 토기, 기와, 금속공예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이홍근실’, 조선 목칠공예품이 돋보이는 ‘김종학실’, 최고의 기와 컬렉션을 보여주는 ‘유창종실’ 등입니다. 일본인들의 이름도 보입니다. ‘하치우마실’, ‘이우치실’입니다. 웬만한 박물관의 소장품은 명함도 내밀기 힘든 명품들이 많아서 중박 소장품의 양은 물론 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박병래 선생의 백자 컬렉션의 경우 “청자에 치우쳤던 국립박물관의 도자 컬렉션을 보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중박은 1946년부터 지난달까지 377곳(개인 포함)에서 2만8648점의 유물을 기증받았습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