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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발언대] 김대유 경기대학교 교수 "공짜로 먹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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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경기도교육청 정책자문위원, 대한교육법학회 이사-

아주경제



"어차피 만점짜리로 준비해와요. 그래도 그래머(Grammar) 들어가면 허점이 많아요. 더 해야되요."

스펙 얘기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재벌급 어학원 간부들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그들이 털어 놓은 불만이었다. 입사를 위한 서류 응시에서 토익, 토플, 텝스 만점짜리를 뽑아도 면접을 해보면 모자란 점이 드러나기에 요즘은 아예 추가로 토익 스피킹과 글쓰기(Writing)를 별도로 요구한다고 한다.

평범한 어학원이 재벌급 회사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와 유사한 대기업의 입사시험 풍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부 역시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교육부가 정한 퇴출 대학의 최대 요건은 취업률이다.

무슨 짓을 하든 취업률만 높으면 ‘좋은 대학’이 된다. 대학의 피눈물나는 구조조정은 학문의 발전과 무관하다. 학과의 개폐는 취업률에 달려있다. 물론 취업률이 높다고 해서 비 명문대학이 명문대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별도다.

그러므로 대학들은 대학서열화 고착과 취업률 신드롬의 이중고에 시달린다. 기업과 정부의 욕망에 끝없이 질주하다가 학문은 무너졌고 자칫하면 퇴출대학이 되는 시대에 학문의 권위는 누추해졌다.

이 스펙과 관련해서 지난 해 고려대학교 3학년생 김예슬양이 대학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예슬은 "자신은 스펙사회 속에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하면서 대자보를 통해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라고 비판하였다.

올해도 일부 고교생들이 수능시험을 거부하면서 언론을 통해 대학 무용론을 주장했다.

이제 한국의 대학에서 전공의 국가경쟁력을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것은 더 웃기는 일이 되었다. 교양과 전공이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오로지 영어공부와 공무원 시험이다.

스펙은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외 영어 자격증, 그 밖의 관련 자격증들을 총칭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 스펙들을 바탕으로 구직자를 평가한다. 이 스펙은 대한민국 대학생들 사이에 하나의 보증수표로 작용하며 최대의 부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스펙은 시간과 돈으로 만들어진다. 보통 수재급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토익, 토플, 텝스를 800점 이상, 높은 등급에 도달하려면 2년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학원비며 교재비용이 최소 500만원 이상이 필요하다. 여기에 최근 기업이 요구하는 토익 Speaking과 Writing을 충족시키려면 어학연수는 필수다. 1년정도 영어권 국가에 유학을 다녀오려면 최소 3천만원에서 5천만원은 기본이다.

이렇게 대학수업을 전폐하다시피 영어 스펙을 쌓아도 취업은 바늘구멍이다.
기업은 그럴수록 만족하지 않고 취준생들에게 더 완벽한 스펙을 요구할 뿐이다. 가만히 앉아서 ‘완제품’을 먹겠다는 뜻이다.

스펙의 여파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연애와 놀이와 결혼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주택구입의 희망마저 반납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절망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연애를 못하니 결혼도 포기해야 하고, 천신만고 끝에 결혼을 해도 기업체에서 사원들에게 끊임없이 스펙을 또 요구하니 출산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 이 세가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나라에서 교육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이 비극적 사태를 초래한 것은 정부와 기업, 대학의 고모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공범이다.

우리 국민들이 비교적 호감을 갖지 않는 일본마저 기업들이 대학생들에게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적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신입생을 뽑고 입사 후에 자체 비용을 들여서 훈련을 시킨다. 정부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그렇게들 한다. 교육의 영역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다. 선진국이란 그런 것이다.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등교육과 대학입시의 분리, 대학교육과 기업선발 기제의 분리, 인문학적 소양과 실증력 넘치는 교육과정, 현장경험이 풍부한 교수인력의 확보, 마음껏 놀 수 있는 중등 교육과정 등을 즉각 도입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가슴 뜨겁게 연애할 수 있는 캠퍼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김기완 기자 bbkim998@ajunews.com

김기완 bbkim998@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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