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풍향계] 쇄신? 숙청? 여의도 또 휘감는 공천학살의 망령
[명품리포트 맥]
약 20년 전, 16대 총선을 두 달 앞둔 2000년 2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선 '공천 학살'이라 불린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그때의 공천 파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국일보 특종 사진입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최측근이던 하순봉 사무총장이 봉변을 당하는 장면인데요.
주먹질 덕분인지 김호일 의원은 공천장을 거머쥐긴 했는데요.
그러나 한나라당의 본류인 민정계와 대구·경북 TK를 대표하던 김윤환 의원과 민주계의 이기택·신상우 의원 등 중진들이 줄줄이 공천에서 탈락했습니다.
김윤환 의원 등 공천 탈락자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민주국민당을 만들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TK와 보수층이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압도적으로 밀면서 총선에서 2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총선 때마다 불거지는 공천 파동.
탈락하는 쪽에선 '공천 학살'이라고 부르고, 칼자루를 쥔 쪽에선 공천 혁신 또는 당 쇄신이라 부릅니다.
명분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4년 전이죠.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는 김종인 비대위 체제의 민주당에서도 같은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당시 김종인 위원장은 친노 좌장이던 이해찬 의원과 유인태 이미경 전병헌 의원 등 중진을 비롯해 86 운동권 그룹인 오영식 정청래 김현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해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20대 총선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에선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진짜 친박근혜계인지, 아닌지를 가려낸다는 '진박 감별사'까지 등장해 이명박 계를 비롯한 비박계 현역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공천 전횡을 견디지 못한 김무성 대표가 당대표 직인을 갖고 부산으로 내려가 버려, 공천장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옥쇄 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코미디 같은 여당의 사분오열에 수도권 표심이 등을 돌렸고, 개헌 저지선 돌파도 가능하다던 새누리당은 민주당에 원내 1당의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1997년 대선에서 자신을 도왔던 김윤환 의원과 같은 동지들을 쫓아낸 2000년 '공천 학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 현장은 20년이 지난 오늘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지난 월요일, 단식농성 이후 처음으로 최고위원회를 주재한 황 대표의 당무 복귀 일성은 '읍참마속'이었습니다.
황 대표가 쇄신 의지를 밝히자, 다섯시간 뒤 현역 의원 24명을 포함한 35명의 당직자가 사퇴서를 일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황 대표는 29명의 당직자는 유임하고, 당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 김세연 여의도연구원장 등 껄끄러운 인사 6명을 솎아냈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초선의 박완수 사무총장 등 황 대표와 가깝다는 인사들로 채워져 사당화 논란이 일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황 대표가 주재한 최고위원회의 의결로 임기 연장이 좌절됐습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황교안 지도부 체제에서 불신임을 받은 건데요, 한국당 비주류에선 황 대표가 "제왕적 대표의 본색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시절 이회창 총재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 원내대표가 최고위 결정에 승복해 일단락하는 듯했지만, 당내에선 파열음이 터졌습니다.
황 대표는 나 원내대표를 비롯해 자신과 결이 다른 의원들을 쳐내고 '친황 체제', 즉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황 대표의 해명에도 여진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황 대표가 '읍참마속'을 외치더니 결국 나경원이 마속이었나"란 비아냥도 나옵니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장군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속은 제갈량과 같은 '형주파'로, 제갈량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인물. 그러나 마속의 무리한 작전으로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목을 내리쳐 군 기강을 지켜냈습니다.
이래저래 제갈량의 결단은 황 대표의 읍참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마지막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한 나 원내대표의 표정에선 복잡한 심경이 읽혔습니다.
대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나 원내대표까지 전격 하차하면서 공천학살의 광풍이 다시 몰아치는 것이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기억하실 겁니다. 최근에 그 영화 속 진범이 이춘재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강력사건의 트라우마가 있는 화성 시민들은 이제 '화성 연쇄살인'을 잊고 '이춘재 사건'으로 불러 달라고 호소합니다.
연말 국회가 끝나면 불어닥칠 여야의 공천 경쟁, 20년 전 이회창 보다 더 예리한 칼날이 여의도의 바람을 가를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여의도 풍향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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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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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리포트 맥]
약 20년 전, 16대 총선을 두 달 앞둔 2000년 2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선 '공천 학살'이라 불린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그때의 공천 파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국일보 특종 사진입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최측근이던 하순봉 사무총장이 봉변을 당하는 장면인데요.
이회창 총재의 명을 받들어 중진 물갈이를 주도했던 하 총장은 공천 탈락자 명단에 포함됐던 김호일 의원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고 사타구니를 걷어차이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주먹질 덕분인지 김호일 의원은 공천장을 거머쥐긴 했는데요.
그러나 한나라당의 본류인 민정계와 대구·경북 TK를 대표하던 김윤환 의원과 민주계의 이기택·신상우 의원 등 중진들이 줄줄이 공천에서 탈락했습니다.
김윤환 의원 등 공천 탈락자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민주국민당을 만들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TK와 보수층이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압도적으로 밀면서 총선에서 2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민국당은 허무하게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사멸했습니다.
총선 때마다 불거지는 공천 파동.
탈락하는 쪽에선 '공천 학살'이라고 부르고, 칼자루를 쥔 쪽에선 공천 혁신 또는 당 쇄신이라 부릅니다.
명분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공천권을 가진 지도부는 새 인물 수혈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4년 전이죠.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는 김종인 비대위 체제의 민주당에서도 같은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당시 김종인 위원장은 친노 좌장이던 이해찬 의원과 유인태 이미경 전병헌 의원 등 중진을 비롯해 86 운동권 그룹인 오영식 정청래 김현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해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해찬 의원은 탈당과 함께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민주당에 복당해 현재는 당 대표에까지 올랐습니다.
20대 총선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에선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진짜 친박근혜계인지, 아닌지를 가려낸다는 '진박 감별사'까지 등장해 이명박 계를 비롯한 비박계 현역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공천 전횡을 견디지 못한 김무성 대표가 당대표 직인을 갖고 부산으로 내려가 버려, 공천장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옥쇄 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코미디 같은 여당의 사분오열에 수도권 표심이 등을 돌렸고, 개헌 저지선 돌파도 가능하다던 새누리당은 민주당에 원내 1당의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1997년 대선에서 자신을 도왔던 김윤환 의원과 같은 동지들을 쫓아낸 2000년 '공천 학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 현장은 20년이 지난 오늘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지난 월요일, 단식농성 이후 처음으로 최고위원회를 주재한 황 대표의 당무 복귀 일성은 '읍참마속'이었습니다.
황 대표가 쇄신 의지를 밝히자, 다섯시간 뒤 현역 의원 24명을 포함한 35명의 당직자가 사퇴서를 일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황 대표는 29명의 당직자는 유임하고, 당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 김세연 여의도연구원장 등 껄끄러운 인사 6명을 솎아냈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초선의 박완수 사무총장 등 황 대표와 가깝다는 인사들로 채워져 사당화 논란이 일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황 대표가 주재한 최고위원회의 의결로 임기 연장이 좌절됐습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황교안 지도부 체제에서 불신임을 받은 건데요, 한국당 비주류에선 황 대표가 "제왕적 대표의 본색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시절 이회창 총재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 원내대표가 최고위 결정에 승복해 일단락하는 듯했지만, 당내에선 파열음이 터졌습니다.
황 대표는 나 원내대표를 비롯해 자신과 결이 다른 의원들을 쳐내고 '친황 체제', 즉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황 대표의 해명에도 여진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황 대표가 '읍참마속'을 외치더니 결국 나경원이 마속이었나"란 비아냥도 나옵니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장군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속은 제갈량과 같은 '형주파'로, 제갈량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인물. 그러나 마속의 무리한 작전으로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목을 내리쳐 군 기강을 지켜냈습니다.
이래저래 제갈량의 결단은 황 대표의 읍참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마지막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한 나 원내대표의 표정에선 복잡한 심경이 읽혔습니다.
대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나 원내대표까지 전격 하차하면서 공천학살의 광풍이 다시 몰아치는 것이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기억하실 겁니다. 최근에 그 영화 속 진범이 이춘재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강력사건의 트라우마가 있는 화성 시민들은 이제 '화성 연쇄살인'을 잊고 '이춘재 사건'으로 불러 달라고 호소합니다.
연말 국회가 끝나면 불어닥칠 여야의 공천 경쟁, 20년 전 이회창 보다 더 예리한 칼날이 여의도의 바람을 가를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여의도 풍향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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