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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사건, 잊히면 안 되는 진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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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다룬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

실화에 허구 보태 금융사건 조명

9년 간의 상황, 수개월로 압축

“관객이 재미있게 봐주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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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실화 영화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경제 공부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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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실화다. 지난 13일 개봉한 ‘블랙머니’는 정지영(73) 감독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매각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7년 만의 신작이다. 고 김근태 의원 고문 사건이 바탕이 된 ‘남영동 1985’(2012)나 김명호 교수의 석궁테러 사건을 극화한 ‘부러진 화살’(2011)처럼 실화가 소재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 국가간 소송(ISD) 재판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진행형 사건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 예컨대 초반부 살인사건은 관객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이다. 주인공 양민혁(조진웅)과 김나리(이하늬) 등도 허구 캐릭터다. 그런데도 현실을 환기시키는 고유명사(CK로펌, 뉴스탐사 등)가 잇따라 등장하고 엔딩과 함께 “단 한명도 구속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픽션과 실제 사이 ‘팩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다 알려주면 무슨 재미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보면서 경제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좋겠다. 수조원대 금액을 들먹이는 금융 사건이라 대중이 거리감을 느낄 법한데, ‘이해 가기 쉽게 잘 풀었다’는 평가가 가장 반갑다.”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정 감독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모호함을 즐기는 듯 보였다. 1983년 감독 데뷔 이래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등 사회성 짙은 시대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일흔 넘은 나이에 글로벌 금융스캔들을 영화화 하는 건 그에게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시작은 2012년 제작사인 질라라비의 양기환 대표가 제안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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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머니’의 주인공 양민혁(조진웅)은 열혈 평검사로 그려진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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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막프로’로 불리는 열혈 검사 양진혁(조진웅)이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라는 거대 금융 비리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담았다. 실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매각하기까진 2003년부터 2012년까지 9년이 걸렸지만 영화는 이를 금융위원회의 매각 결정 직전 수개월의 우여곡절로 압축했다. 주인공 양진혁을 ‘경알못’(경제를 알지 못함)으로 설정해 관객이 함께 금융 지식을 깨쳐가게 돕는다.

이에 반해 전직 총리 출신으로 CK로펌 고문을 맡고 있는 이광주(이경영)는 감독이 생각하는 ‘모피아’의 전형처럼 보인다. 대한은행 매각 과정에 깊숙이 ‘검은 손’을 드리우고 정계 커넥션을 통해 검찰 고위직 인사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영화에서 모피아 세력도 그들만의 명분이 있다. 내 소신이 ‘영화는 자기 철학과 세계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거다. ‘남부군’(1990) 때 우파에선 ‘아니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려? 얼마나 잔인한 놈들인데!’ 했고, 좌파에선 ‘빨치산을 저렇게 감상적으로 그리다니. 얼마나 강성이고 신념에 투철했던 이들인데!’ 했다. 작가나 감독이 ‘내 의도를 왜곡하지 말아라’라고 하는 건 어리석다. 나는 되도록 많은 관객이 재미있게 봐주길 원할 뿐이다.”

검찰수사에서 ‘혐의없음’ 결론 난 것을 야합의 결과처럼 그린 건 사실 왜곡 아닐까. 이에 대해 정 감독은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검찰이 수사 성의가 없었던 걸로 본다”고 했다. “론스타가 인수 자격이 없는 산업자본이란 게 뒤늦게 알려졌지만 책임진 사람이 없다”면서 “게다가 외환은행 인수 직전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갑자기 바뀌게 된 진실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론스타 사건을 환기하는 의미에 대해선 “론스타는 끝난 일이 아니다. ISD는 강한 나라 기업이 약한 나라 정부에게 가하는 것이고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서 “물어줘야 할 돈이 5조원대라는데 이게 다 세금이다. 금융자본시대에 살면서 은행에 돈 넣고 잊어버린 채 함부로 살면 소수 기득권자가 우리를 농락할 수 있단 얘기”라고 강조했다.

반응은 엇갈린다. 이런 정 감독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한국을 약자 지위로 보는 시각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 “잊힐 뻔한 사건을 들춰내고, 시대의 환부를 건드리는 정지영 특유의 날 선 감각을 확인”(김혜신 영화평론가)했다는 평가도 있다.

정감독의 차기 작품은 경찰 관련 영화 ‘고발’(가제). 이번에도 실화 소재다. 그는 “내 관심을 끄는 실화란, 사람들이 심각하지 않게 넘기는, 그런데도 우리 삶과 가치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들”이라며 “내 작업은 결국 힘 있는 자들, 기득권자들이 좀 놔주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서 생기는 비극을 짚는다”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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