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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氣도, 백두대간 氣도 받았다… 통일될 그날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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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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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 간담회에 참석해 현지 대북 전문가들과 북한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김정은의 백두산 백마 등정이 화제에 올랐다. 한 미국 전문가가 북한 사람들이 아직도 '백두산의 기(氣)'와 같은 관념론적 선전을 믿는가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미국 학자가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하늘로부터 백두산으로 한민족의 기가 내려온다고 믿는다. 차이라면 북한에선 백두산의 기가 김씨 일가에게로 내려온다고 믿는 것"이라고 답했다.

기를 믿는 문화가 그들 관점에선 신기하게 보이는 듯했다. 나는 "동양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라는 학설이 등장하면서 기를 믿고 있다"면서 "기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반도만큼 좋은 곳도 없다"고 자랑했다. 구체적으로 "한반도는 중국 대륙에 뿌리박고 백두산을 주간(主幹)으로 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한민족이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좇아 동쪽으로 이동해 자리 잡은 것이다. 천(天·우주의 본체)의 영기가 백두산으로 내려와 땅 구석구석에 생기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나라를 가봤지만 한국만큼 삼천리 방방곡곡 두루 산 좋고 물 좋은 나라는 없었다고 하니 미국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꺾기 위해 전국의 명산 꼭대기마다 말뚝을 박아놓았는데 북한에선 몽땅 뽑아버렸다는 얘기도 해줬다. 참석자들은 "일본 사람들까지 백두산의 기를 믿느냐"면서 흥미로워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백두산의 기를 믿는지, 기를 받으면 오래 사는지 등을 물어왔다. 김씨 일가는 기를 받으려고 한 해에도 여러 번 오르지만 남들보다 특별히 오래 산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북에 있을 때 백두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여러 번 오른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의 기를 받으려면 새벽에 등정해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봐야 한다고 한다. 기운을 받으려고 가는 거지만 동료에게는 일출을 보러 갔다고만 한다. 공식적으로 북에서 백두산의 기는 오직 김씨 일가만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운이 나쁘면 날씨가 흐려 여관에서 며칠씩 묵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도 "백두산의 기를 받기 위해 머무른다"고 말하면 큰일 난다. 그저 해 뜨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다고 해야 한다. 실제로 백두산에 올라 동해에서 떠오른 해를 봤을 때의 감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의 기가 내 몸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한국에 와서 보니 백두산 정기에 대한 해석이 조금 달랐다. 한국의 지인들은 백두산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타고 흘러내려 오면서 더 강해진 기운이 빠져나올 때 받아야 한다고들 했다. 그러고 보니 경북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는 매년 새해를 맞아 '백두산 호랑이 기 받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백두산의 기가 빠져나온다는 경남 산청의 왕산에서 기를 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내가 운영하는 남북함께아카데미에서 대학생들을 데리고 산청에 내려간 적도 있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산청 동의보감촌에 도착해 다시 산길을 오르니 사찰 형태의 건물 3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백두의 기가 빠져나간다는 이곳에 '대한민국 국새 전각전'도 있었다. 현 정부가 사용하는 '대한민국 국새'를 여기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옆에 2층짜리 전통 목조건물이 있는데 백두산의 기를 받는 '등황전'이었다. '봉황이 오른다'는 뜻의 등황전은 바로 뒤에 있는 해발 1100m 왕산의 정기를 받는 곳이라고 했다.

등황전 마당에 커다란 돌이 있었다. 거기에 한 사람씩 서서 눈을 감고 하늘로 손을 높이 쳐들어야 기가 몸에 와 닿는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 나와 대학생들 차례가 왔다.

어쨌든 백두산에서도 정기를 받고, 백두대간을 거쳐 나온 기도 받았다. 이 정도면 통일될 그날까지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태영호·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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