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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펭귄도 맞벌이·이혼·내 집 마련 전쟁… 사람과 비슷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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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남극 펭귄 특파원, 이원영 연구원

조선일보

이원영 연구원이 지난달 21일 인천 극지연구소에서 설상차(雪上車)에 오르고 있다. 펭귄과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을 막는다는 그는 "펭귄이 싫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대신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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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펭귄이 짧은 날개를 쫙 펴고 얼음 언덕을 내려간다.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귀엽지만 위태롭다. 미끄러지는 펭귄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줌아웃(zoom-out). 푸른 남극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새하얀 언덕을 펭귄 수십 마리가 오르내린다. 지난 1월 극지연구소 이원영(37) 선임연구원이 남극 현지에서 촬영해 트위터에 올린 이 영상은 16만명이 보고 6000명 넘게 공유했다.

국내 유일의 펭귄 행동 생태 연구자인 그는 겨울 한정 '남극 특파원'이 된다. 2014년부터 매년 겨울 남극으로 간다. 펭귄 연구다. 이씨는 남극에서 갓 찍은 따끈따끈한 펭귄 영상을 1만㎞ 넘게 떨어진 한국으로 배달한다. 남극의 눈 밟는 소리와 펭귄이 '응가'를 분출하는 모습까지 담긴 그의 트위터 영상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 1월 아델리 펭귄들이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은 영상의 조회 수는 40만. 트위터 팔로어가 2만7000명인데, 1만2000번 이상 공유됐다.

이씨의 영상에는 남극에서 펭귄을 오래 관찰한 과학자 특유의 시선이 담겼다. "아슬아슬 잘도 다니지만, 가끔 굴러 떨어지기도. 한번은 다리를 심하게 다친 녀석도 봤다. 참 힘들게 사는구나. 조사를 위해 나도 매일 오르락내리락. 참 힘들게 사는구나." 그가 영상과 함께 올린 트윗이다.

"남극에서 본 펭귄은 사람만큼이나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야생동물이었어요." 지난달 21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만난 이씨가 말했다. 그는 29일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벌써 여섯 번째 남극행이다. 연구실은 드론 등의 연구 장비부터 텐트와 가방 등 남극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으로 가득했다.

남극에서 본 펭귄의 민낯

―겨울이 되면 남극에서 온 영상을 기다리는 팬이 많습니다.

"남극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영상을 올리니 현장감이 느껴진다고 좋아해 주셨어요. 오전에 찍은 펭귄 영상을 점심 먹으러 기지에 들렀을 때 트위터에 올려요. 남극에서는 그나마 텍스트 기반인 트위터가 제일 빠르거든요. 저화질로 올리면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다큐멘터리는 전문 감독들이 펭귄의 귀엽고 예쁜 그림을 기다려 찍어요. 저는 작가도 아니고 기다렸다 찍는 것도 아니거든요. 연예인 같은 펭귄 모습보다 짝짓기나 분변 배출처럼 펭귄의 실생활을 담은 영상을 신선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소셜미디어에 글과 영상을 올리는 이유는요.

"과학자로서 대중에게 맞는 언어로 펭귄 행동에 숨은 뜻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동료 과학자들에게 논문으로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학자들만 알긴 아까워서요."

―펭귄은 남극을 좋아하나요

"좋아서 사는 것 같진 않아요(웃음). 펭귄들은 보통 산등성이에 둥지를 틀어요. 눈 위에 알을 낳을 수 없으니까 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이 날아간 곳을 찾거든요. 먹이를 구하러 언덕을 내려가다가 굴러떨어져 다리를 절뚝이기도 해요."

사람이나 펭귄이나 육아 전쟁

―펭귄이 사람 같다고 느낄 때가 있나요.

"펭귄은 암수가 동등하게 육아를 해요. 한 마리가 바다로 먹이를 구하러 가면 한 마리는 알을 품거나 새끼를 지키죠. 부모 펭귄이 합심해서 열심히 일해야 새끼 둘을 간신히 키워요. 부모는 바다에서도 둥지에서도 편히 못 자요. 사람도 요즘은 맞벌이해야 아이 둘을 간신히 키우잖아요. 아이 키우기 어려운 건 사람이나 펭귄이나 똑같더라고요."

―펭귄은 일부일처제라고요.

"일부일처제라고 해서 짝이 평생 가는 게 아니고 한 번식기에만 배우자를 하나로 유지하는 거예요. 다음 번식기엔 이혼하고 다른 배우자를 찾기도 합니다. 펭귄뿐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이 이혼하거든요."

―왜 이혼하는 걸까요.

"배우자가 육아에 소홀할 때 이혼하는 것 같아요. 새끼가 살아남으려면 부모 둘이 최선을 다해야 해요. 상대가 열심히 육아하지 않으면 다음 해엔 다른 펭귄을 짝으로 고르는 거죠."

―펭귄판 '사랑과 전쟁'일까요.

"이혼한 짝과 재결합하기도 합니다. 다른 짝으로 바꿨는데도 번식 성공률이 나쁘면 원래 짝에게 다시 돌아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둥지 짓기는 펭귄의 '내 집 마련'이네요. 사람처럼 바다로 통근하기 쉬운 둥지가 인기인가요.

"펭귄에게는 포식을 덜 당하는 위치가 제일 잘나가요. 펭귄 번식지는 둥지 간격이 50㎝ 정도로 빽빽해요. 둥글게 만들어지는 번식지 가운데에 둥지를 지어야 추위도 막고 가장자리부터 공격하는 포식자들로부터 안전하죠."

―번식지 중간에는 누가 사나요.

"펭귄도 신혼부부일수록 둥지 잡기가 어려워요. 번식을 갓 시작해 매년 찾던 둥지 자리가 없는 펭귄들은 가장자리에 둥지를 짓는다고 해요.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부부일수록 중간에 둥지를 짓고요."
조선일보

남극에서 펭귄을 조사하는 이원영 연구원. "펭귄 날개에 잘못 맞아 멍 든 적도 있다"고 했다. /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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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겨울은 남극의 여름

―한국에도 없는 펭귄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요.

"대학원(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는 까치의 행동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석 달 정도 백수로 지내면서 밥벌이가 절박해졌을 때, 극지연구소에서 펭귄 연구할 사람을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펭귄을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1년만 보고 시작했어요."

―'맨땅에 헤딩'이었네요.

"펭귄 연구를 먼저 시작한 일본 극지연구소 연구자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펭귄 잡는 법, 펭귄 몸에 테이프로 관측 장비를 붙이는 법처럼 현장에서 펭귄을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기술을 배웠죠. 현장에서는 제일 중요하지만 논문에는 나오지 않는 기술이에요."

―남극에서 어떤 일을 하나요.

"바다로 나가는 펭귄을 잡아서, 카메라와 위치 추적 장치, 수심 기록계 등의 장비를 붙여요. 둥지로 돌아오면 관측 장비를 회수해 그 자료를 분석합니다. 펭귄이 바다에서 얼마나 깊이 잠수하는지, 언제 물 밖으로 나오는지 등을 연구할 수 있죠."

―남극의 하루는 어떤가요.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연구하러 나갑니다. 오후 6시까지가 일과지만 6시까지만 일하는 연구자는 아무도 없어요. 한국의 겨울은 남극에선 여름이라 펭귄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번식기예요. 펭귄이 24시간 일하는데 제가 딱 8시간만 일할 수 없잖아요. 자정 넘어 새벽까지도 종종 일합니다."

―치열하네요.

"남극에서는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일해야 해요. 블리자드처럼 강한 바람이 불면 안전 문제로 기지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남극에서 지내는 두세 달 안에 계획한 실험을 못 하면 1년 뒤에나 할 수 있죠. 날씨만 좋으면 늘 일하는 날입니다."

―남극에서 가장 힘든 부분을 꼽자면.

"늘 곁에 누군가 있다는 거예요. 남극에서는 안전 문제로 늘 2인 1조로 다녀야 해요. 잠잘 때도 같이 자야 하고, 일할 때도 같이 일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조금만 떨어져 있자'고 얘기해요. 다들 예민한 상태라 동료와 많이 싸우기도 하고요."

―매년 연말연시를 남극에서 보냅니다. 많은 남편의 꿈이라던데요.

"아내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요. 설날에도 남극에 있게 되면 아내에게 죄인이 돼요. 한국에 있을 때 잘하려고 하는데 그 시간을 메우기가 어렵네요."

최근 5년 동안 그는 펭귄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펭귄 박사의 꿈은 아내와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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