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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글로벌 인사이트] 라가르드 “리먼사태? 리먼시스터스였다면 양상 달랐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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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취임한 라가르드 ECB 수장

평소 여성의 권리 찾기 적극 옹호

통화정책 경험 없고 경제학 비전공자

저성장 늪에 빠진 유로존 살려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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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에르메스 스카프와 가방, 샤넬 정장 등을 즐겨 입어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의 비공식 홍보대사’로도 불린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패션을 적극 활용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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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은발 머리에 분홍색 재킷, 알록달록한 스카프, 진주 귀걸이, 서류가 잔뜩 든 에르메스 ‘버킨백’은 크리스틴 라가르드(Lagarde·63) 유럽중앙은행(ECB) 신임 총재의 트레이드 마크다.

유럽 통화정책의 키를 쥔 ECB 사상 첫 여성 총재 라가르드는 ‘파워 드레싱(부와 권력을 갖춘 이들이 자신의 지위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입는 격식 있는 복장)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때와 장소에 맞는 패션을 소화한다는 평을 받는다. 미국·유럽에서는 ‘패션 정치학’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일 정도로 패션은 중요한 외교·정치적 수단으로 여겨진다.

통화정책 경험이 없는 데다 경제학자 출신도 아닌 전 국제통화기구(IMF) 총재가 빨간불이 켜진 유럽 경제에 구원투수로 나서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라가르드의 등장은 ECB가 경기 부양을 위해 정치력을 발휘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미 폴리티코는 “라가르드 총재가 중앙은행 이력이 없다는 비판은 핵심을 놓친 것”이라며 “지금 ECB에 필요한 것은 프랑스 재무장관과 IMF 총재로서 유럽 지도부와 강한 인맥과 정치적 기술을 가진 리더”라고 강조했다. 미 블룸버그는 “구체적인 분석과 정책은 경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라가르드 자신은 업무 스타일상 EU 회원국 정상들과 만나 외교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 등 ‘3저(低)’ 늪에 빠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일본식 장기 불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자의 ‘정책’보다 회원국의 합의를 끌어내는 ‘정치’가 더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정통 경제학자 출신인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보다 미국 정가에서 전설적인 협상력을 발휘한 라가르드가 지금 ECB 총재로 적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재정확대 이끌어낼지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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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성장률.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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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호(號)는 출범 전부터 암초를 만난 상황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진단했다. 유로존 경제는 올해 2분기에 전 분기 대비 0.2% 성장하는 데 그쳤고, 독일은 같은 기간 성장률이 -0.1%를 기록했다. IMF는 지난달 유로존의 성장 전망치를 올해 1.2%, 내년 1.4%로 지난 4월 전망치보다 각각 0.1%포인트 낮춰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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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인플레이션율.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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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 정책 금리에도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유로존의 인플레이션은 0.8%로, ECB 목표치인 2.0%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다. 특히 덴마크와 스위스의 인플레이션은 각각 0.5%와 0.1%에 그쳤다. 지속적인 저물가는 저혈압과 마찬가지로 경제의 건강에 위협적이다. 소비가 맥을 못 추면 기업은 좀 더 비싼 값에 제품과 서비스를 팔기 힘들어진다. 기업은 활기를 잃고 생산과 투자를 줄이고 경제는 더 쪼그라든다.

게다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둘러싼 리스크는 여전하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12월 영국 조기 총선을 거쳐, 내년 1월 31일 브렉시트를 마무리 짓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 또한 불확실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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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예금금리.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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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은 라가르드 총재가 전임자 드라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FT는 “드라기가 ECB를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처럼 바꿔놓은 데 이어 라가르드는 ECB를 정치적 기구로 또 한 차례 변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ECB는 ‘정책 총알’이 거의 다 떨어져 통화 완화 정책을 더 확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ECB의 기준금리와 예금금리는 각각 0%, -0.5%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드라기 전 총재는 지난달 28일 퇴임식에서 “ECB의 현재 통화정책은 과거와 달리 경기부양에 힘을 못 쓰고 있다”며 회원국의 재정정책 확대를 촉구했지만, 돈 풀 여력이 있는 독일·네덜란드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다.

중앙은행 ‘정책’보다 ‘정치’가 중요

드라기가 남긴 숙제를 넘겨받은 라가르드의 첫 시험대는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재정 확대를 끌어낼 수 있느냐다. 1일 취임한 라가르드 총재는 첫 연설에서 “독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지침일 뿐 아니라, 유럽의 이념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움직이는 나라”라며 독일의 적극적인 인프라 투자를 촉구했다.

문제는 저축률 높은 독일이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는 ECB 정책에 불만을 드러내며 비협조적이라는 점이다. 독일 타블로이드 빌트는 드라기 전 총재가 독일인의 예금 이자를 빼앗아 재정이 부실한 남부 유럽을 지원한다며, 피를 빨아먹는 괴물 드라큘라에 빗대 ‘드라길라’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미 스탠퍼드대 후버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멜빈 크라우스는 “드라기 전 총재가 유럽의 인플레이션을 높이지 못한 주된 이유는 독일이 협력하지 않아서였고, 라가르드도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 회원국이 마이너스 금리에 반기를 들며 분열하는 상황도 라가르드가 당장 수습해야 할 일이다. 대표적인 매파(통화긴축 신호)로 통하는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는 물론이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비롯, 통화완화 정책을 강하게 지지했던 이탈리아 중앙은행까지 마이너스 금리가 자산 거품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EU 집행위가 조사하는 유로바로미터에 따르면, 회원국 인구의 약 40%가 ECB의 경기 부양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라가르드는 내부적으로는 유럽 집행위원회의 결속을 다지고, 브렉시트 리스크를 줄이며, 대외적으로 미국이 벌이는 무역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며 “본인의 장점인 소통과 타협 능력을 십분 발휘할 때”라고 전했다.

■ 특유의 ‘패션정치’ 시험대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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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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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펌 베이커앤드맥킨지의 첫 여성 회장을 시작으로, 주요 8개국(G8) 최초 여성 장관, IMF 최초 여성 총재, 그리고 ECB까지, 가는 곳마다 ‘여성 최초’ 타이틀이 따라붙는 라가르드(사진)가 유독 주목받는 이유로 화려한 패션이 꼽힌다. 몇 년 전만 해도 세계적인 여성 리더들의 특징은 짧은 헤어스타일에 무채색 바지 정장이었다.

그러나 라가르드 총재는 해외출장 일정 중에 보석 쇼핑을 뜻하는 ‘돌(stone)’을 공개적으로 써넣을 정도로 액세서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당당히 드러낸다. 그는 “진정으로 강해지기 위해선 때로 인생을 즐길 필요가 있다”고 했다. 2011년 미 연예 정보지 베니티 페어는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여성’으로 라가르드를 선정했다.

라가르드의 어린 시절 독특한 이력도 화제가 되곤 한다.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영어와 문학 교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국가대표를 지냈다. 고등학생 때는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미국과 인연도 깊다. 대학 졸업 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윌리엄 코언 상원의원의 인턴 보좌관을 맡기도 했다.

이후 시카고에 기반을 둔 로펌인 베이커앤드맥킨지에서 기업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고 1999년 회장에 올랐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그를 통상장관으로 발탁했고 니콜라 사르코지는 재무장관으로 낙점했다.

여성 권리 찾기에 적극적인 라가르드가 ECB 수장이 된 것을 계기로 유럽 금융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그는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대해 “리먼브러더스가 리먼시스터스였다면 경제위기는 분명히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며 여성의 능력을 강조해왔다.

■ 크리스틴 라가르드

1956년 1월 1일 프랑스 출생

1980년 파리제10대학교 법학 석사

1999년 베이커앤드맥킨지 첫 여성 회장

2005년 프랑스 통상장관

2007년 프랑스 농업·재무장관

2008년 FT 선정 ‘유로존 최고 재무장관’

2011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2019년 11월 1일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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