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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지하철 비싸면 조조할인 이용” 장관 말에 칠레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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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째 시위 칠레 산티아고 르포

비상선포 직후 대통령 가족 외식

부인은 “외계인 침공한 것 같아”

공감능력 부재가 시위 기름 부어

“불평등 해소, 고위층 특권 없애라”

중앙일보

자전거 시위대 옆에서 한 시민이 3일(현지시간)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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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시위대의 성지가 된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 휴일인 3일(현지시간) 정오 무렵 부터 수천대의 자전거가 광장을 메우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모인 시위대는 자전거에 깃발을 꽂거나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돌았다. 자전거 물결은 인근 발마세다(Balmaceda) 광장으로 이어졌다.

자전거 행렬이 빠져 나간 자리는 여성단체와 청소년 단체 등이 메웠다. 이곳 원주민 마푸체(Mapuche)족도 광장으로 집결했다. 불평등 해소와 헌법 개정,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외쳤다.

광장에서 만난 히메나 카누이(27)는 “이 모든 사태가 30페소(약 47원) 인상에서 비롯됐다고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이라며 “칠레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정부가 꿈을 펼칠 기회를 억압한다”고 말했다.

오후 5시 무렵 시위대가 규모가 더 커지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는 돌로 응수했다. 정부와 시위대간 충돌이 17일째 지속되는 건, 대통령 등 권력층의 부적절한 언행과 처신이 민심을 자극한 때문이기도 하다. 120만명이 운집한 지난달 하순 시위에서 피녜라 대통령 부인인 세실리아 모렐의 음성 녹취 파일이 SNS를 통해 공개됐다. 모렐이 지인들에게 이번 시위를 언급하며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외계인이 침공한 것 같다”고 말한 내용이 담겼다.

시위대를 외계인에 비유한 발언을 두고 시위대가 격하게 반응하자 모렐은 사과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3일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난 이그나시오 하케(30)는 “현실을 모르는 어이 없고 황당한 말”이라며 “고위층 특권을 없애고 이 사회가 평등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누엘 플로레스(29)도 “외계인 탈을 쓰고 나와 조롱하는 시민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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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는 가운데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가족과 외식을 하는 등(오른쪽 사진) 안이한 대응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소셜미디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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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격화한 지난달 18일 저녁. 피녜라 대통령이 라 모네다 대통령궁 (Palacio de la Moneda) 인근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여유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식당 손님 중 한 명이 찍어 SNS에 올렸다. 거리에선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격화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였다. 지하철과 버스 노선이 끊겨 발을 동동 구르던 퇴근 길 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세실리아 페레즈 정부 대변인은 “대통령도 사람이다. 누구나 식사할 권리가 있다”고 대통령을 감쌌지만 역풍을 맞았다. 소셜미디어에는 “평화롭게 먹으려고 비상사태 선포했냐” “조카 생일을 다른 날 하거나 집에서 축하할 수는 없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시위 도화선은 정부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 발표였다. 그런데 후안 안드레스 폰테인 경제산업관광부 장관은 시민들의 불만에 “새벽에 일어나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은 출퇴근 시간엔 800페소(약 1256원), 조조할인 요금은 600페소(약 942원)다. 그 외에는 700페소(약 1099원). 안드레스는 최근 개각에서 경질됐다. 글로리아 후트(Gloria Hutt Hesse) 교통통신부 장관은 환승 혜택 등을 고려하면 지하철 요금이 다른 국가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가 멀어진 민심을 더 멀어지게 했다.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정부의 리더십, 지도층의 공감 능력 결여가 결국 사상 초유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취소로까지 번진 셈이다.

산티아고(칠레)=임종주 특파원 lim.jongju@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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