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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현장에선] 이름값이 아닌 전문가 감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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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분야만큼 불공평한 곳도 없다고들 한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선수를 이기기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재능으로 스타가 된 선수가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은퇴 후에도 감독 자리까지 비단길을 걷는 것 또한 익숙한 현실이다. 이렇게 스포츠계는 한번 스타는 영원한 스타라는 ‘이름값’이 지배해 왔다.

세계일보

송용준 문화체육부 차장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프로야구를 필두로 감독 선임을 두고 새바람이 불고 있다. 이른바 스타급 사령탑들이 떠난 빈자리를 무명이었던 숨은 인재들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염경엽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 통산 타율이 1할대에 머물렀던 그는 코치와 구단 프런트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넥센(현 키움) 감독을 거쳐 지금은 SK를 이끌고 있다. 올해 키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장정석 감독 역시 선수 시절 대타 요원에 불과했고 은퇴 뒤에는 매니저 등 궂은일을 도맡아 오던 인물이었다. 올해부터 NC를 이끄는 이동욱 감독 또한 선수 시절 1군 79경기 출전이 전부였지만 코치로서 능력을 보여주면서 감독 자리까지 올랐다. 이들 모두 선임 당시 파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흐름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인 구단 중 하나였던 삼성이 9월 말 파격의 대열에 동참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명망가나 프랜차이즈 스타가 독점했던 삼성의 사령탑 자리에 무명 선수 출신에 전력분석이 주 업무였던 허삼영 감독이 선임된 것이다. 1군 4경기 출전이 전부였고 프런트가 된 뒤에도 외부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인사였지만 구단 내부에서는 업무와 소통능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삼성까지 깜짝 발탁하자 취재진 사이에서는 이제는 스타 선수만 챙겨야 하는 게 아니라 프런트, 코치 누구 하나 허투루 볼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변화는 감독의 이름값이 구단의 성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단들이 인식한 결과다. 유명하지 않아도 전문적 지식을 갖춘 채 묵묵히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겐 큰일을 쥐여줘도 좋은 결과물을 산출해 낸다는 것을 ‘파격 인사’들이 입증해보인 것이다. 야구단을 대하는 모기업의 태도 변화도 이름값 거품이 빠진 요인이다. 한때 프로야구는 대기업 오너들에게 장기판이란 말도 있었다. 그래서 장수로 누구를 쓸지를 위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야구 전문가가 아니고 구단 내부를 잘 알지 못하는 ‘윗선’은 이름값 있는 인사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낙점받아 내려오는 경우를 프런트가 더 좋아하기도 했다. 성적부진 등의 책임을 감독에게 미루고 프런트는 보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프로구단을 대하는 모기업의 생각도 달라졌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구단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게 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면서 이름값이 아닌 숨어있는 진짜 ‘준비된’ 전문가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탄생한 지 37년이 넘어서야 감독 선임 과정에서 명성이라는 허울을 벗고 기회의 공정성이 자리 잡아가는 모습이다. 비단 스포츠계뿐 아니라 아직도 많은 분야가 여전히 이름값에 얽매여 있는지 모른다. 명성과 간판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주위를 둘러보면 뛰어난 인재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프로야구가 보여주기 시작했다.

송용준 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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