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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수)

[기자의 시각] 野黨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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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윤형준 정치부 기자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찾을 때마다 언론이 보도하는 단골 소재가 있다. 여당 의원이 얼마나 박수를 했는지, 그리고 야당 의원들은 어떤 방식으로 항의 표시를 하는지 등이다. 대통령 연설이 정부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면, 여야(與野)의 제스처는 정부 정책이 얼마나 호응받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야당은 대통령 시정연설 때마다 알맞은 항의 방법과 수위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대통령과 여당을 적절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한국당이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적절한 항의'보다는 '무례(無禮)'에 가까웠다. 한국당 의원들은 이날 문재인 대통령 시정연설이 끝나자마자 줄줄이 본회의장을 나섰다. 대통령은 악수하려고 의원들 뒤를 쫓는데 야당 의원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모양새가 됐다. 문 대통령이 연설 도중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언급하자 일부 의원은 양손으로 '엑스(X)' 자를 만들거나 귀를 막으며 반대의 뜻을 표한 것도 전례 없던 풍경이다. 그나마 한국당은 역풍(逆風)을 우려해 지난해 시정연설 때 했던 '피켓 시위'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회 투쟁엔 '일가견'이 있는 현 집권 여당도 야당 시절 대통령 시정연설 땐 최소한의 예우를 갖췄다. 손뼉을 치지 않거나, 현안과 직결된 문구를 내보이는 정도가 통상적 항의 방법이었다. 그마저도 내부 반발이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15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때 '국정교과서 강행 반대'란 문구를 노트북에 붙이는 방식으로 항의 뜻을 표했다. 당시 유인태(현 국회 사무총장) 의원은 본회의장에 들어갔다가 바로 퇴장하는 방식으로 '시위'에 불참했다. 문구를 노트북에 붙이지 않은 황주홍(현 민주평화당) 의원은 당시 본지 통화에서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입법부의 품격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민주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마지막 시정연설(2016년 11월 24일) 때도 '조용한 항의' 기조를 이어갔다. 당시는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민주당에 한창 자신감이 붙어 있는 시기였다. 몇몇 의원이 피켓을 들었을 뿐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한국당은 '조국 사태'의 반사이익으로 당 지지율이 상승한 지금을 '르네상스'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조 전 장관을 '조국씨' '귀하'라 부르는 모습이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겼 듯, 이번 시정연설에서 비슷한 효과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원수에 대한 '무례'에는 거부감을 먼저 느끼는 게 보통의 국민 정서다. 품격 잃은 야당에서 대안을 찾을 국민은 없다는 점을 한국당은 알아야 한다.

[윤형준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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